한국일보

남편 혼내주라는 시어머니 보셨나요

2006-05-1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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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별 따기, 이럴 때 두고 하는 말이다.
마더스 데이를 맞아 색다른 이야기를 다뤄보고자 특집 2부 여기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아이디어가 ‘아름다운 고부’였다. 쉽게 이야기 주인공을 찾으려니 했다. 그러나 웬걸. 자타가 공인하는 마당발 기자들이 안테나를 세우고 ‘아름다운 고부’를 찾아 남가주 일대를 뒤졌지만 이건 완전히 ‘모래밭에서 바늘 찾는 격’에 다름 아니었다. 그때 가뭄 속 단비처럼 희소식이 날아들었다. 정말 자타가 공인하는 아름다운 고부가 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갈등이 하늘을 찔러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며느리들이 넘쳐나는 21세기에 정말로 아름다운 고부가 있었으니 바로 이 단비의 주인공들은 구옥연(65)․김은아(32)씨다. 조심스럽게 제시한 인터뷰에 이 아름다운 고부는 아무 타박 없이 흔쾌히 그러마했다.
지난 3일 며느리 은아씨가 살고 있는 LA 한인타운 한 콘도에서 이들, 모녀보다 더 살가운 고부를 만나는 행운을 아낌없이 누렸다.
 
◇천사표 시어머니와 마주 앉다
애당초 편견을 없애기란 불가능했다. 아직 시어머니가 아닌, 여전히 며느리이기만 한 기자가 아름다운 고부를 만나면서 며느리의 선행보다는 시어머니의 사람됨에 더 눈길이 가는 것은. 그러나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이들 관계를 요모조모 따져봐도 역시 시어머니 구옥연씨는 정말로 입이 딱 벌어질 만큼 도가 트인 사람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인터뷰 내내 그는 뭐 뾰족한 수 있나. 다들 한 발짝씩만 양보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왜 사람 살면서 서운한 거 없겠어? 그럴 땐 한 살이라도 더 나이 먹은 내가 한번만 더 생각하고 양보하면 되는 거지
그렇다고 그가 이런 ‘아량’ 넓은 말을 할 만한 사정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이의 표현대로 서른 일곱, 시댁에서 소박 맞기 직전에 얻은 자식이 바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아들이 대연(30)씨다. 게다가 다른 넓은 방 놔두고 굳이 아들내외 자는 같은 방에서 창호지 덧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잘 만큼 유별한 시어머니 밑에서 고추당초보다 맵다는 시집살이도 호되게 했다. 왜 그러하지 않던가. 시집살이도 맵게 한 사람이 매운 시집살이 다시 시킨다고. 그리고 또 다들 알지 않는가. 딸이 있다손 치더라도 어머니의 외아들에 거는 기대 혹은 집착을 말이다. 그런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어머니 노릇은 너무 헐렁해 아들이 한 10여명쯤은 있어 보일 만큼 도량 넓다.
◇이 고부가 사는 법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은아씨 집에 온 시어머니를 위해 저녁상을 정성껏 봤는데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저녁식사 성화에도 그냥 집으로 가더란다. 나중에 왜 그랬냐고 물어봤더니 ‘처음부터 그렇게 저녁상 차리기 시작하면 계속 차려내야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바쁜 며느리에게 그런 부담을 지우기 싫었다’고 털어놓는다.
서로 고부의 인연을 맺은 지 햇수로 어느새 5년째. 결혼 할 때부터 너 같은 놈 데려갈 여자 없다며 아내한테 잘하라고 아들에게 신신당부했다는 이 별난 시어머니는 이제는 며느리의 가장 좋은 인생 상담자며 든든한 보호막이 됐다.
남편이 속 썩이면 어머니한테 쪼르르 전화해 이르죠. 그러면 어머니가 그럴 땐 남편을 확 잡아야 한다면 혼내주라고 말하세요. 근데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에요. 그러면 슬그머니 남편이 불쌍해져 봐주기도 하고 그러죠(웃음)
이에 질세라 시어머니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은아가 얼마나 야무진지 몰라요. 요즘 젊은 아가씨 같지 않죠. 한창 놀고 싶을 나이인데도 야무지게 비즈니스 잘하죠. 살림도 잘하죠. 제발 좀 쉬엄쉬엄 하라 해도 말을 안 들어요. 바깥 일 하랴, 딸 키우랴, 집안 일 건사하랴 옆에서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죠.
그렇게 말하는 이 예순을 넘긴 시어머니의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한다. 옆에서 손을 꼭 잡고 있던 며느리도 어머니의 눈가를 따라 함께 눈물이 방울방울 고이려 한다. 그러나 냉정히 따지고 보면 요즘 한인사회에 바깥일 안하고, 자식 안 키우고, 집안 일 안 하는 며느리가 어디 있는가. 남들 다 하는 일 하는 며느리인데도 시어머니의 마음은 어느새 시집 간 막내딸 고생하는 냥 마음이 아파 오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실 자체로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마음 씀씀이가 더 아름답지 않은가.
게다가 이 마음 약한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감동시키는 재주도 범상치 않다.
얼마전 어머니가 약주 하시고 집에 오셨어요. 평소엔 별로 말씀이 없으신 분이데 갑자기 사랑하는 내 딸 그러면서 꼬옥 안아주시는 거예요. 어머니께 받은 선물 중 가장 값비싼 선물이었습니다.
이 믿을 수 없는 고부의 미담은 계속된다.
몇 년 전 당뇨를 얻은 시어머니를 위해 매일매일 잡곡밥을 지어 시댁으로 나르는 은아씨는 아파트에 사는 시어머니가 안쓰러워 같이 살자고 해도 어머니는 요지부동이다.
어휴, 같이 살긴… 아무리 사이좋은 사람들도 같이 살면 의 상하는 법이야. 왜 노인네가 젊은 사람 귀찮게 쫓아다녀. 그냥 자기네들끼리 잘 살면 그게 좋은 거지…
이런 호방한 시어머니 성격 탓인지 사돈지간 관계도 그저 사이좋은 자매지간이다. 은아씨 친정 어머니와 시어머니는 이제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어제 저녁도 사돈네 가서 자정까지 수다 떨고 왔다는 시어머니의 말 폼새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며느리와 사위가 아닌 아들과 딸을 공유한 진정한 가족이 된 것이다.

◇살가운 며느리, 무뚝뚝한 시어머니와 친구 되기 
은아씨는 첫눈에 맘씨 좋은 맏며느리 감이다. 생글생글 웃는 눈웃음이며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조분조분한 말솜씨가 자칭 무뚝뚝한 시어머니 마음을 녹이고도 남아 보인다. 어머니에게도 친구인양 아주 사소한 일을 가지고도 하루에 서너 번씩 안부 전화를 걸고, 친구처럼 자잘한 일에도 관심을 보이며 이야기를 건네니 어느 어르신인들 은아씨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구옥연씨의 며느리 자랑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얘가 가식이 없어요. 저렇게 잘하는 것이 무슨 속셈이 있어서라거나 무슨 계산이 있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맘에 우러나서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금방 알겠거든. 저렇게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데 누가 싫다 하겠어요. 내가 원래 성격이 좀 뚱한 편인데 은아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웃어요’
여기에 시어머니와 잘 지내는 은아씨의 노하우도 한 몫 한다.
아직 연륜이 짧긴 하지만 어머니와 사소한 오해가 생겨도 그 자리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요. 문제가 생겨도 일단 어머니 말씀을 듣거나 그냥 그 시간이 흘러가게 내버려둬요. 그러다 보면 진실이 밝혀지죠. 오해도 저절로 풀어지고요. 맞서 싸우기보다는 잘 구부러지는 것도 삶의 지혜인 것 같아요󰡓

<구옥연씨가 말하는 아름다운 고부관계 유지법>
▶며느리에게 100% 기대하지 말라=함께 수십 년 산 부부도 맘이 맞지 않을 때가 있는데 세대가 틀리고 자란 환경이 틀린 며느리에게 어떻게 내 마음 같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기대가 큰 만큼 상처가 크게 돼 있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집안 살림에 대해, 육아문제에 대해 일체 간섭하지 않는다. 한두 살 먹은 아이들도 아니고 잔소리한다고 고쳐지기도 힘들뿐 더러 의만 상한다. 결혼 한 성인은 결코 품안의 자식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다.
▶며느리 티끌보다 아들의 대들보를 보라=아들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하나 둘 꼽다 보면 저런 아들 데리고 사는 며느리가 용하다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며느리도 자식처럼 어여뻐 보인다.


<글 이주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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