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머니의 아들

2006-04-29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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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가는 손이 귀한 집안이었다. 할아버지의 장남, 즉 백부님 댁에는 남매, 차남인 우리 집에는 딸 둘, 셋째 숙부님네는 딸 하나, 그런데 넷째 삼촌이 결혼을 하자 아들이 줄줄 둘이나 나오고 또 임신중이었으니 온 집안에 생기가 돌고 막내 숙모님은 각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어머니의 첫 애는 아들이었는데 겨우 몇일을 살고 갔다고 한다. 다음이 언니였고, 그 다음에 내가 나왔고 내 밑으로 난 아이가 아들이어서 어른들이 나더러 복덩어리라고 했다던가. 그런데 그 아들도 호적에 올릴 새도 없이 잃고 말아서 결국 언니와 나, 딸 둘밖에 남지 않았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께서 시키시는 대로 아들을 보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셨다. 함경북도의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추운 겨울에 새벽이면 얼음을 깨고 강물에 몸을 담근 후 그 길로 절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고 했다. 어렸을 때 내가 본 것은 뒷방에서 큰어머니가 어머니 배에다 불을 붙이고 있는 끔찍한 광경이었다. 내가 울며 큰어머니를 말렸으나 “남동생을 봐야하니까 할아버지가 명령하셨다”는 것이었다. 3,000번 뜸을 뜨면 아들이 들어선다고 하는 말에 어머니는 매일 그 따가운 뜸을 어금니를 악물고 참아냈으나 허사였다.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차남부부를 불렀다 한다. “다음에 막내 네가 또 아들을 낳으면 어미젖을 물리기 전에 받아다 호적에 올리고 키워라” 억장이 무너지는 명령이었으나 할아버지의 말씀은 그 아무도 거역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읍으로 가서 일본에서 나오는 ‘메리미루꾸’라는 연유와 우유병, 주전자, 불을 지피는 풍로, 기저귀 감 등 한 짐을 이고 오셨다. 그리고는 아기 옷도 만들고, 젖 만드는 연습도 하시면서 아기를 맞을 준비를 하시는 것이었다.
어느 날 늦은 밤에 어머니는 옥양목 앞치마를 두르고 산실 밖 창문을 바라보며 신생아의 울음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다니던 나도 눈을 비비며 곁에 서있었다. 차라리 그 아기가 딸애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머니는 그 몸을 깎는 고생을 면했을 테고 아기를 떼놓은 산모가 부른 젖가슴을 싸매고 남몰래 울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날부터 어머니의 고역이 시작되었는데 자다 깨보면 무릎 위에 아기를 놓고 앉아서 졸고 계셨다. 전기가 없는 시골에서, 호롱불을 낮추고 풍로 위의 주전자 물은 언제라도 젖을 만들 수 있도록 끓고 있었다. 그 애가 세 살 때 읍에서 ‘건강아 선발대회’가 있었는데 당당히 우량아로 뽑혀 그동안 애쓰신 보람을 찾은 듯 했으나 그만 홍역을 앓다 가고 말았다. 새로 짠 스웨터를 입혀보지 못하고 불 속에 던져 넣으며 오열하시던 어머니의 옆얼굴을 쳐다보며 눈물 흘리던 생각이 난다.
어머니의 두 번째 아들은 내가 소학교 5학년 때 데려왔다. 먼 친척집 아이여서 성이 같아 자연스럽게 우리 식구가 될 수 있었는데 실은 복잡한 사연이 있는 아이라 이집 저집 옮겨다니다 만 네 살이 되어 우리 집에 왔을 때에는 정서불안으로 꽤 망가져 있었는데 어머니는 헌신적으로 보살피셨다. 다행이 똑똑하고 눈치가 빠른 애라 한 1년 지나니까 명랑한 귀염둥이로 변했다. 나는 아버지와 첩을 미워하고 눈물만 짜는 어머니까지 싫어하던 시기에도 그 동생만은 사랑해주고 싶던 기억이 난다.
해방 다음 해 북의 생활을 견딜 수 없던 어머니와 언니는 동생을 데리고 나를 찾아왔다. 마침 여름방학이라 종로 ‘박문서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는 혈육을 만난 반가움보다 “큰일 났구나 이 식구들을 어쩌면 좋지?” 하는 당혹감이 앞섰다. 천신만고 끝에 20일이나 걸려 캄캄한 한탄강을 건너 38선을 넘었다는데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왕년의 고등여학교 멋쟁이 교사 언니의 몰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다. 온통 긁히고 피멍이 들고… 언니는 열살이나 먹은 남동생을 업고 허리까지 잠기는 한탄강 물살을 가르며 몇번이나 휩쓸릴 뻔하면서도 살아서 이렇게 왔노라며 까맣게 그을른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는데 나는 말이 안 나왔다.
할아버지께서는 어머니의 노후를 위해 아들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주신 걸로 짐작하는데 해방이 되자 그 아들 때문에 발버둥치며 온갖 노동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짐은 고스란히 딸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동생은 대학과 공군에서 좋은 기술을 익혀 독립해나가고, 어머니는 나와 함께 사셨다. 내가 서울을 떠나면서 언니가 모시다 몇해 후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날이 가까워오니 우리 어머니에게 있어 아들이란 어떤 존재였던가 생각해보게 된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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