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숙희 기자의 주방일기

2006-04-26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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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재성의 어머니

얼마전 교회에서 이정희 권사님과 마주쳤다. 키가 훌쩍 커버린 우리 아들을 보고는 깜짝 놀라신다. “아유, 얘가 언제 이렇게 컸어. 아빠보다 더 크네” 하시며 나를 보고 “이쁘고 대견하지?” 물으신다. “그럼요, 너무 좋아요” 만면에 미소가 가득한 나와 아들을 번갈아 보시던 권사님, 갑자기 눈가를 훔치며 “허참, 너무 보기 좋으니까 내가 다 눈물이 나네” 하고 돌아서신다.
그제서야 아차, 이 철딱서니 없는 아줌마, 누구 앞에서 아들 자랑을 한거야… 너무도 죄송하고, 가슴 아프고, 후회되었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 지나간 상황이었다.
이정희님은 고 이재성군의 어머니다. 이재성은 4·29 폭동때 숨진 유일한 한인 희생자, 폭동에 휩싸인 코리아타운을 지키겠다고 집을 나섰다 총에 맞아 숨진 18세의 아름다운 청년이다.
그가 3가 길의 차가운 보도 위에 쓰러져 숨져있는 사진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사진을 당시 LA타임스 사진기자였던 강형원씨가 찍었고, 다음날 아침 한국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으며, 밤새 아들을 기다리던 이씨 부부는 한국일보로 달려와 그 사진을 보고서야 아들의 죽음을 확인했던, 기막힌 비극의 스토리가 폭동의 역사 속에 숨어있다.
내가 이정희님을 개인적으로 처음 만난 것은 폭동이 약 6년 지난 후였다. 새로 이사간 구역의 모임에서 만났는데 처음에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 신문에서 보아온 이재성의 어머니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4·29 기념일이 돌아올 때마다 검은 옷을 입고 슬픈 표정으로 아들의 묘지에 꽃을 놓는 사진만 보았던 나는 이정희님이 너무나 예쁘게 웃으시는 모습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권사님은 밝고 명랑하고 유머 넘치는 분이었다. 항상 웃는 얼굴에 농담도 잘 하시고, 만나는 사람마다 편하게 대해주시기 때문에 누구나 좋아하는 분위기 메이커, 인기 구역원이었다.
이정희님과 가까이 지내온 8년여 세월동안 나는 한번도 재성이에 관해 이야기를 꺼내본 적이 없다. 어느 누가 그럴 수 있으랴. 그러다 며칠전 권사님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강한 체 하느라고 속으로 숯검정을 태우며 살아왔다”며 들려주신 그날의 이야기다.
폭동이 절정에 이른 4월30일 밤, 라디오에서 다급하게 도움을 요청하는 한 여자의 목소리가 전파를 탔다. 3가와 호바트 건물 지붕위에서 폭도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으니 빨리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아들 에디는 방송을 듣자마자 돕겠다며 친구들과 차를 타고 나갔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방송국에 전화한 그 여자, 그 목소리가 지금까지 권사님의 가슴에 한으로 맺혀있다.
밤새 한잠도 못 자고 아들을 기다리는데 다음날 아침 한국사람 하나가 희생되었으며 그로 인해 폭동이 좀 사그러들었다는 뉴스가 나왔다. ‘누군지 가엽게 희생양이 됐구나’ 생각하면서 가판대에서 한국일보를 집어들었지만 1면에 실린 사진은 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사촌의 전화를 받은 딸이 에디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하였을 때, 이정희님은 남편과 한국일보로 달려갔다. 사회부 기자가 혹시 이 아이가 아니냐고 사진을 보여주는데, 뿌옇게 나온 흑백사진을 보면서 그녀는 아니라고 말했다. 입고 나간 옷이 흰색 셔츠였는데 이 사람 옷은 검은 색이니 절대 아니라고, 그리고는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흑백사진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길에 누워있는 아이를 보는 순간 나는 알았어. 예쁜 뒤통수와 얼굴 윤곽, 잘 생긴 콧날, 그걸 엄마가 어떻게 몰라봐. 하지만 우리 아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더라구…”
그 무렵의 얼마전, 딸 제니의 건강이 좋지 않아 한참 울었던 적이 있다. 그때 에디가 뒤에서 엄마를 꼭 끌어안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엄마, 하나님 믿지? 믿지? 믿으면 제니가 먼저 가더라도 슬퍼하지 마. 그렇게 좋은 천국에 가는건데 뭐. 그리고 우리도 금방 가서 만날거잖아” 그것이 바로 자신의 간증이었다고 권사님은 회상한다.
“세상 아무 것도 안 부러운데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만 보면 미치겠어. 그날 교회에서 원겸이를 보는데 어찌나 이쁘던지… 우리 재성이도 뚱뚱했는데 키 크면서 그렇게 홀쭉하게 올라갔거든. 신문에서 장애아가 늘어나고 문제아가 많다고들 해도, 나는 그 부모들이 부러워. 설사 자식이 감옥에 있다 해도 살아만 있다면 좋겠어. 면회라도 가서 볼 수 있잖아. 나는 정말이지 해 넘어가는 것도 싫고, 크리스마스니 발렌타인스 데이가 오는 것도 싫어. 4월이 오면 가슴에 커다란 담이 하나 막아선 것 같은데, 그렇게 4월을 넘기면 5월엔 또 재성이 생일이 돌아오지…”
권사님과 나는 눈물 콧물 범벅이 된 채 더 이상 이야기를 잇지 못했다.
오는 토요일은 미주 한인들이 잊을 수 없는 4·29 폭동 기념일이다. 재미한인교포들의 한을 한 몸에 안고 희생된 이재성군, 에드워드 리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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