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떼를 치며 케빈 우즈가 만난 예수님

2006-04-2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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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갑을 훌쩍 넘긴 한 여인이 벌써 20년 넘겨 새벽 2시에 일어나 부산하게 움직이며 살았습니다. 어두운 새벽공기가 이제는 친숙한 삶의 일부분이 된 셈입니다. 여인네가 홀로 지내는 날들 속에 외로움과 적적함도 숨어있을 법한데, 여전히 부지런한 모습 속에는 그런 감정들은 사치처럼 보였습니다. 여느 여인네들이 가꾸듯, 몸치장할 여가도 없이, 이미 희어져버린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삶을 두고 부르심에 응답하는 매일을 사는 것으로 아름다움을 가꾸는 그런 여인네입니다.
나성의 새벽거리에 술판이 끝나갈 무렵, 새벽장사를 준비해야하는 일손들이 바쁘게 더 윤택한 삶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 이 여인은 거리에 ‘버려진 사람’들을 다시 찾으려는 안간힘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음식 챙기고, 옷가지를 정리하며 오늘 새벽도 노숙자들을 위해서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 귀한 삶은 책 속에 적힌 복음을 오늘의 ‘좋은 소식’으로 만드는 거룩한 행보입니다.
지금부터 한달 전쯤 2월11일도 여느 새벽처럼 글로리아 김 선교사님은 그날의 음식과 옷가지를 정리하고 노숙자들을 찾아 나서려고 할 때, 집 앞에 쓰러져 자고 있는 노숙자를 보았습니다. 그때가 새벽 3시쯤인데, 추운 날씨에 옷도 제대로 걸치지 않고 쓰러져 자는 모습이 안쓰러워, 자신이 입고 있던 잠바를 벗어 걸쳐주고 안으로 데려와서 먹이고 재웠다고 합니다. 김 선교사님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지만 예수님을 믿고, 그에 대한 이야기들을 줄줄이 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용기와 결단 없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침에 일어난 노숙자, 케빈 우즈(Kevin Woods)라는 사람을 앉혀놓고 선교사님이 사역하시는 시온선교회에 대해서 설명했더니, 케빈은 흔쾌히 최선을 다해서 선교회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둘이서 음식을 싣고 산에 올라 기도하고 노숙자들을 찾아 음식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교도소에서 나와 갈 곳 없이 다시 교도소로 향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만한 삶을 살았던 케빈에게는 새로이 살아갈 이유를 찾은 셈이 된 것입니다. 눈병으로 고생하는 글로리아 김 선교사님과 교도소에서 출감하여 운전면허증도 없는 케빈이 오늘 새벽도 찬 공기를 가르며 노숙자를 위한 음식과 옷가지와 사랑을 싣고 나성의 버림받은 거리를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중에 칼 라너(Karl Rahner)라는 사람의 글이 생각났습니다. ‘익명의 그리스도’(Anonymous Christ)라는 제목 하에 그는 누구든지 진정한 사랑으로 버려진 자를 품을 때 거기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말쑥하게 차려입고 아름답게 만들어진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만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 3시에 나성의 쓰레기 같은 길거리에서 케빈이 만난 분은 예수님이라는 믿음이 갑니다. 글로리아 김 선교사님의 손길을 통하여 틀림없이 예수님은 거기 계셨던 것으로 믿어집니다.
주일에 선교사님을 뵈올 때, 나는 그녀의 소박하고 풍요로운 미소 앞에 아직 삶의 굴레를 벗지 못한 어정쩡한 종교인으로 서있습니다. ‘버려서 얻어지는 삶’을 살겠다고 벼르고 사는 것이 몇십 년인데, 아직도 결단 없는 목사로 있습니다. 나성의 거리에는 가명을 써가며 예수님이 늘 다시 오신다고 합니다. 하늘에 천사장의 나팔소리도 없이, 그동안에 원수 같은 무리들의 피 흘림도 없이, 버려진 자들을 주를 보듯(마태복음 25장)하는 귀한 손들의 모습으로 매일 재림하신다고 합니다. 그날 새벽 케빈은 주를 만났으니, 우리가 사는 나성도 성지가 되는 모양입니다.

곽 철 환 목사
(윌셔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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