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기독교 역사로 보는 오늘의 교회 ⑫ ‘11세기, 카놋사의 굴욕’

2006-03-31 (금)
크게 작게
■11세기 주요 사건일지

▶ 1008 레닌그라드 코덱스 완성
▶ 1033 안셀름, 스콜라 신학 창시
▶ 1054 동,서 교회 대분열
▶ 1057 서임권 논쟁 가열
▶ 1071 셀주크족 아르메니아 정복
▶ 1077 카놋사의 굴욕사건
▶ 1096 제1차 십자군 전쟁
▶ 1099 예루살렘 탈환


황제가 교황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것도 눈이 하얗게 쌓여있는 카놋사 성문 밖에서 파면 철회를 간청하며 무릎 꿇고 3일 동안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빌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4세 황제는 이렇게 굴욕적인 사죄 끝에 그레고리 7세 교황으로부터 파면 철회를 받아 겨우 황제 자리에 머물 수 있었다.
밀라노 주교 임명권을 놓고 표면화된 황제와 교황의 갈등은 결국 황제의 ‘교황 폐위선언’, 그리고 이에 맞선 교황의 ‘황제 파면조치’라는 힘겨루기 한판 승부로 발전했다.
하인리히 4세 황제는 1076년 제국의 귀족들을 소집한 보름스 제국회의에서 “교황은 성직 자리를 마음대로 매매하는 거짓 수도사 장사꾼이다. 그는 교황으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고 공개 비난한 뒤 황제의 자격으로 그레고리 7세를 폐위시킨다고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황 그레고리 7세는 하인리히 4세 황제를 기독교에서 파문시키고 신성 로마제국 전역에서 성례 및 예배 집행을 중지시켰다.
그런데 당시 중세 사회 분위기상 성례에 참여하지 않고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믿음이 팽배해 있어 자연히 민심은 황제의 경솔한 행동을 비난하는 쪽으로 흘렀고, 귀족들은 파문 철회가 되지 않는 한 새 황제를 세울 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모았다. 교황을 가소롭게 생각하고 폐위 조치를 선언했던 황제가 완전히 코너에 몰린 상황이 된 것이다. 황제는 교황에게 특사를 파견해 정중하게 사과했으나 교황은 들은 척도 안 했고, 결국 황제 스스로 교황이 머물고 있던 카놋사 성을 찾아와 문밖에서 3일 동안 굴욕적인 사죄를 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10년동안 와신상담 보복의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하인리히 4세는 이번에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산을 넘어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무력으로 밀어내고 대립 교황 클레멘트 3세를 세움으로 개인적인 복수를 이뤘다. 그렇지만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황제의 이미지는 이미 크게 손상되었고, 교황권은 더욱 강화되었으며, 교황청은 세속 군주 국가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누가 성직자를 임명할 권한이 있느냐는 문제를 놓고 격돌한 서임권 논쟁은 카놋사의 굴욕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2세기 중반에 와서야 “황제는 성직자를 서임하는 권한을 포기하고, 성직자의 선출을 교회에 이관할 것을 약속한다”는 보름스 정교협약을 맺게 된다. 이때부터 로마교회 교황은 추기경들이 모여 선발하는 전통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
교황의 세도는 서임권 논쟁에서 승리하며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만 갔고, 서유럽제국의 황제들을 마음대로 농락했다. 힘과 권력을 가지고 어찌할 줄을 모르던 교황 우르반 2세는 1096년 예루살렘 성지 탈환이라는 명분으로 마침내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전쟁은 향후 200년 동안 서유럽과 중동, 북아프리카 지역을 피로 물들게 한다.
11세기의 신학자 안셀름(Anselm)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리적 증명, 즉 존재론적 논증법(Ontological Argument)을 제시하며 직관과 이성을 동시에 중시하는 스콜라 신학 전통을 일궈냈다. 그의 영향을 받아 13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이라는 스콜라 신학의 대작을 완성하게 된다.


백 승 환 목사
<예찬 출판기획 대표>
/baekstephen@yahoo.com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