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연말 대청소

2005-12-06 (화)
크게 작게
연말이면 마음이 허전해서일까? 공연히 사람들은 일을 만들어 자신을 분주하게 한다. 나 역시 또 새로운 보따리를 만들어 이번엔 벽 한쪽에 쌓아놓고 새해를 맞게 되려는지.


지난 봄 내내 오피스 공사를 했다. 처음엔 4주를 예정했는데 결국 4개월이 걸렸다. 그것도 정말 공사가 끝난 게 아니고 서너달째에 접어들자 나의 인내력에 한계가 왔다. 한쪽에선 환자 치료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방에서 드르륵 쾅쾅 못 박는 소리가 났다.
아, 됐습니다. 괜찮아요, 그냥 이대로 쓰지요. 나는 공사 감독에게 사정을 하여 일을 마무리지었다. 대기실이 좁아서 복도에까지 나가 서있는 환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된 공사는 하는 김에 여기도 조금, 저기도 조금 하다가 마침내 전체 사무실을 다 뜯고 새로 벽을 넓히는 대공사로 변했다.
내가 쓰던 작은 방을 옆방으로 옮기는 것도 이사였다. 서랍마다 어떻게 그리 많은 물건이 들어있었는지 잡동사니 서류들, 먹다만 비타민과, 볼펜 등이 꾸역꾸역 쏟아져 나왔다. 제법 묵직한 돼지 저금통도 나왔고 환자들의 어금니 빠진 것과 엑스레이 필름도 나왔다. 몇 년 전 새 지폐로 발행된 20달러짜리도 한 장 건졌고 기념품 삼아 가져온 선교지 나라의 화폐도 나왔다.
아무도 대신 정리해 줄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이 일 역시, 반나절만에 손을 들었다. ‘지난 6개월 동안 필요 없었던 물건은 영원히 쓸모 없다’는 생활의 지혜를 위안 삼기로 했다. 다음 주말에 시간 나면 하지 뭐. 나는 이 날 정리하지 못하고 내 책상 옆에 쌓아둔 박스들을 반년이 지나도록 다리를 높이 들어올리며 넘어 다녔다.
그러다가 지난 주말, 드디어 박스 모서리에 채어 넘어질 뻔 하는 것을 계기로 연말 대청소를 시작했다. 박스 맨 밑바닥에서 발견한 보물 중에는 아이들이 장난 삼아 내게 만들어 보낸 크레딧 카드도 있다. 딱딱한 종이를 잘라 만든 크레딧 카드의 은행 이름은 ‘좋은 아빠 은행’. 카드 소유자 칸에는 자기들 이름이 적혀 있고 만기일 칸에는 ‘평생’이라고 적었다. 대청소에 돌입한 뒤, 점심을 함께 하자는 친구의 청을 거절했더니 당장 이메일을 보내왔다.
제목은, 청소하는 남자를 위한 도움말. (1)청소를 하겠다는 생각을 가능한 빨리 잊는다. (2)화장실 변기는 그냥 뚜껑을 덮어두면 된다. (3)샤워장은 간단히 샤워 커튼을 닫아둔다. (4)손님이 오는 마지막 순간까지 버틴다. (5)카펫은 뒤집어 깐다. (6)그래도 배큠이 필요하면 세일즈맨을 불러서 시범을 해보라고 한다. (7)먼지는 눈 높이만 닦는다. (8)빨래? 감춰둘 좋은 장소를 찾는다. (9)쓰레기는 옆집 남자를 시킨다. 어젯밤에 허리를 삐끗했다고 말한다. (10)접시는 당연히 식기 세척기를 돌린다. 잘 안 씻어졌으면 씻어질 때까지 계속 돌린다. 그러기에 내가 뭐래? 종이접시 쓰랬지?
연말이면 마음이 허전해서일까? 공연히 사람들은 일을 만들어 자신을 분주하게 한다. 나 역시 또 새로운 보따리를 만들어 이번엔 벽 한쪽에 쌓아놓고 새해를 맞게 되려는지.
얼마 전, 가까운 어른 한 분이 세상을 떠나셨다. 고인이 원하셨던 대로 화장을 모시기 위해 장지에 동행했는데, 마지막 순간에 안경도 벗기고 50년 넘도록 끼고 계시던 가락지도 빼고 옷가지도 모두 벗겨내었다. 10여년 전쯤에 내가 만들어 끼워드렸던 틀니도 뽑아 가족에게 전달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모습 그대로 가는 것을 보니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갈지라~~~” 하던 욥의 말이 생각났다.
난 지금 이미 너무 많이 가진 것은 아닐까?

김범수
<치과의사>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