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2005-10-07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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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레방앗간에서

나 어릴 때 살던 시골집에서 산기슭을 따라 한참 걸어가노라면 어느 밭머리엔 사뭇 옛날부터 어른 키보다 큰 선돌이 서 있었고 더 지나 아랫마을 뒤를 돌아가면 좀 떨어진 호젓한 곳에 물레방앗간이 있었다.
명절이 다가오거나 하여 밀이나 쌀을 빻으러 식구들이 이고 지고 길을 나서면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한참 전인 나도 무턱대고 따라붙기도 했는데 가뭄으로 물이 줄거나 멀리 읍내에 생긴 콩닥거리는 신식 고방 때문에 손님이 줄어 매번 방아를 돌리지는 못했던 것 같다.
물길을 따라온 한 다발의 맑은 물이 쏟아져 내리면 커다란 나무 바퀴가 츠르륵 츠르륵 돌아가고, 굵은 나무굴대가 파고든 어둑한 방앗간 안은 피댓줄이랑 곡식 섬들로 어지러운 속에 어머니와 누나가 머리에 수건을 쓰고 짧은 빗자루를 들고 왔다갔다하는데, 눈썹이나 콧등에도 보얗게 가루가 묻어 있던 기억이 난다.
나더러는 일로 자꾸 오지 마라, 절로 나가 있거라 하며 내치니, 심심하고 챙김을 못 받는 게 뜨악해서 밖으로 나오면, 소잔등에서 짐을 부리는 어른이 있어 또 에비, 절로 가라, 비켜라 하면서 뚱땅한 가마니짝을 땅바닥에 쿵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다 물레방아를 돌리고 난 물이 골 깊게 내달리는 넓지 않은 도랑가에서 어느 순간 나는 소스라치는데, 내가 처음으로 거기 서 있는 나를 확연히 내려다보고, 다음 순간 어머니와 누나가 나와는 갈라져 절벽 저편에 있는 다른 사람임을 깨닫고 몸을 떠는 것이었다.
그 때 밝고 어두움은 뚜렷이 갈라져 보였고 눈은 비로소 선명히 초점을 모을 수가 있었는데, 흐르는 물살은 조금 소리를 내었고 가장자리의 기울어진 들국화 송이가 앉아 붙은 작은 잠자리와 함께 물에 조금씩 잠겼다 들렸다 까닥대고 있었다. 이러고는 머잖아 나는 어린 날의 그 그림폭에서 대추씨처럼 발라져 나와 사바를 떠돌면서 멀리서 홀로 스산한 나날을 곱씹기도 하는 것이었다.
중학생이 되어 그 마을을 지나칠 때엔 방앗간은 이미 흔적만 있었고, 그 후 가끔 시외버스를 타거나 하면 ‘물방앗간 뒷전에서 맺은 사랑아’라든가 ‘고향의 물레방아 오늘도 돌아가는데’ 또는 ‘돌고 도는 물레방아 인생’같은 노래가 흘렀는데, 군부대가 있는 전방의 동네 이발소에는, 흰 알프스를 배경으로 호수엔 백조가 노닐고, 히말라야 삼송이 둘러싼 물방앗간의 초가지붕에는 박이 달리고, 마당에는 토종닭들이 모이를 쪼는 등 완전 짬뽕 그림이 걸려 있곤 하였다.
그러다 이승의 수레바퀴는 건너 뛰어 아이들은 훌쩍 자라 멀리 떠나니, 어쩌다 와도 바깥에서 밥 한 끼 같이 먹는 시간을 맞추기도 쉽지 않은데, 한인촌의 어느 식당 현관에 앉아 기다리자니 한 쪽 구석에서 조그마한 장식용 물레방아가 돌아간다.
그 방앗간의 흉내만 낸 조그마한 문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수건에 보얗게 내린 밀가루 속에 젊었던 어머니의 얼굴을 찾고 있는데, 초점은 흐려지고 또 흐려진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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