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 속의 부처 ‘불경의 숲’

2005-08-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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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경전을 찾아 헤매다 보면 참으로 숲과 같이 많은 것이 불경이라고 할 수 있다.
종파에 따라 더 중시하는 경전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한국과 미주의 한국 절은 조계종이 다수를 차지하고 조계종에서의 일반 대중법회에서는 거의 늘 천수경과 반야심경 같은 경전들이 읊어지고 때로 금강경이 읽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한국 불교의 경전들은 거의 모두 고전 중국어, 즉, 한문으로 되어 있고, 요즘 한국 사람들은 예전보다 더 한자를 모르니, 음만 한글로 달아 놓은 경전을 달달 외기도 한다. 한문 지식이 상당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니, 한 평생을 한문 공부에 바친 조선 시대 선비라 할지라도 어느 불경이나 한 번 보고 우리말 읽듯이 뜻을 내리 새기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밤새도록 곡하고 났더니 누가 죽은 줄을 모르겠더라고, 평생 절에 다니면서 입에 줄줄 외는 경전들도 뜻을 물어 보면 무슨 말인 줄을 잘 모르는 분이 많은 게 현실인데, 알음알이가 신심이나 불성을 모두 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러한 문자와 언어상의 문제는 지름길을 두고 가시밭길로 돌아가는 대단한 낭비가 아닐 수 없다.
미국사람들은 다행히 한문을 몰라서이겠지만 이 방면의 전문가가 원전을 읽어 완전히 소화한 후에 쉬운 자기들 말로 불경을 옮겨 써놓았으니, 입문한지 얼마 안 되는 미국사람일지라도 이런 책들을 읽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한국 불자들보다 더 정확히 알고 있기 쉽다. 이들 앞에서 좀 안답시고 어정쩡한 설명을 하거나 섣불리 이래라 저래라 한다면 혼동을 주거나 밑천이 탄로날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는 세종대왕 때부터 불경을 한국말로 번역하기 시작했지만 중국식 불교가 뿌리 내린 지 이미 오래였고 기득권 층의 저항에다 문화란 본래 보수성이 강하여 불경의 한국어화, 불교의 한국화가 제대로 이뤄질 수 없었다.
얼마 전부터 일부 뜻있는 분들이 한문 해석의 차원을 벗어나 한국말 불경을 의식과 신행에 사용하고 있는데 조금씩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만 흐름을 바꾸는 데는 어차피 시간이 좀 걸리는 일이다. 그것은 때로는 해괴하기까지 한 국적없는 외래 풍조는 무분별하게 잘도 받아들이면서도 자기자신의 역사에서 누적된 모순이나 불합리나 불편을 조금이나마 개선하려는 이런 저런 토착적인 움직임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거나 내놓고 비웃는 한국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한국말 성경으로 선교에 나선 기독교에 비하여 아직 걸음마인 불교는 이런 면에서 이제 한국에 갓 들어온 신흥 종교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애써 가다듬은 우리말로 경전을 읽고자 해도 아무래도 신비한 감이 없고 가벼워 보이며 운율이 안 맞아 그윽한 맛이 없다는 둥 입맛을 다시는 분들이 아직도 많은데 이분들의 말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한국 불교의 진정한 대중화와 토착화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는 어색하더라도 다듬어져 가다 일단 정착하고 나면 언제 그랬던가 싶게 익숙해지는 것이 또한 문화이며, 예전엔 왜 그렇게 어려운 한문 불경의 숲 속에서 길을 잘 못 찾고 헤매기만 했던가, 왜 그런 어리석은 일을 그리 오래도록 되풀이하고 있었던가 하고 우스워하고 안타까워하는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이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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