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르띤의 스페인어 회화와 중남미 문화 산책 ¡Hola! amigo

2005-06-15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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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권 중남미 독립과 아메리카 제국

제322회. 아메리카제국 44. 월남전쟁 3
미국은 월맹 즉, 매서추세스주 만한 땅 덩어리에 약 700만t의 폭탄(제2차 세계대전 때 유럽과 아시아에 퍼부은 폭탄 양의 2배)과 막대한 양의 화학 고엽제를 살포하고서도 전쟁에서 이길 수 없었다. 미국의 정치, 군사 지도자들은 베트남의 특성이나 전통, 문화, 역사 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며, 결국 이같은 무지가 미국에 정말로 비싸고 참담한 패배를 안겨준 것이었다.

1968년 3월16일 베트남의 한 작은 부락에서 미군에 의한 처참한 민간일 학살이 일어났다. 물론 전쟁 중 민간인에 대한 이러한 학살사건은 비일비재하였으나 모두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다.
‘미라이’란 이름을 갖고 있던 그 부락을 미군들은 ‘핑크 빌’이라 불렀다. 미군들이 가지고 있던 지도상에 베트콩의 본거지로 의심되는 곳에는 핑크색으로 표시해 놓았기 때문이었다.
그 부락을 작전지역으로 하는 찰리 부대(찰리 중위의 지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는 지난 3개월 동안 전투도 한번 못해본 상태에서 1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사기도 형편없었고 부대장은 꼭지가 돈 상태였다.
작전 당일 대대장 메디나 대령은 찰리 부대에 “핑크 빌을 소탕하라”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간 베트콩 저격병에 의한 저격과 부비트랩으로 많은 사상자를 낸 부대의 부대장으로서 뚜껑이 열린 데다가, 민간인과 베트콩을 구별할 방법이 전혀 없었던 찰리 부대의 대원들은 동료들의 죽음과 전상에 분노와 좌절감을 되씹고 있을 때였다. 악에 바친 찰리 부대원들이 헬리콥터로 미라이 촌에 당도해 보니, 눈에 띄는 것은 노인과 부녀자 그리고 아이들뿐이었다. 베트콩을 눈을 씻고 봐도 없었고 무기 저장고나 곡물 저장고도 발견할 수 없어 미라이 부락이 베트콩의 공격 기지가 될만한 증거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은 부대장 찰리 중위의 명령에 따라 모든 부락민들을 마을 한 가운데로 집합시키고 모인 사람들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붓기 시작하였다.
부락민들을 모조리 쏘아 죽인 미군은 부락의 모든 집들에 불을 지르고 수류탄을 던져 쑥대밭을 만들고 말았다. 참가한 미군 모두 공범자로 입을 다물었으나 카메라를 뺏긴 전속 사진사의 다른 비밀 카메라로 560여명이 아무 이유 없이 학살당한 현장이 촬영되었다. 몇 년 후 사건이 폭로되어 관계자가 군법회의에 섰으나 강등, 견책 등 가벼운 처벌로 끝나고 있을 수 있는 과오로 처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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