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말씀과 진리

2005-06-10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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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먼저 있은 것일까, 그 말이 가리키는 물건이나 일이나 생각이 먼저 있은 것일까? 아니면 둘이 동시에 생겨난 것일까? 우리가 어떤 것을 말로 떠올리거나 나타낼 수 없을 때 그 어떤 것은 정말로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어떤 것을 말로 얘기할 수 없을 때도 우리는 그것을 알고 있는 것일까?
서양철학과 현대 언어학이 오랜 세월과 복잡번쇄한 과정을 거쳐 얻은 결론은 그야말로 말은 말일뿐이라는 싱거운 얘기다. 즉, 말이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고 모든 면에서 상대적이고 불완전하며 임의적이고 사회적인 약속일 뿐이다.
만약 어떤 두 사람이 같은 내용의 말을 하거나 한 사람이 한 자리에서 차례로 같은 말을 뇌까릴지라도, 그 두 말은 발음에서뿐만 아니라 의미에 있어서도 백 프로 완벽하게 같은 뜻, 같은 색깔일 수가 없고 상대적인 편차가 생기는데 이러한 틈이 더 벌어지면 와전과 오역, 오해가 생기고 의사전달에도 지장이 생긴다.
녹음기는커녕 종이도 속기사도 없었던 수천년 전에는 사정이 더 나빠서 오직 사람들의 불완전한 기억력에만 기대야 했고, 여러 민족과 계층에 속한 잡다한 사람들의 귀와 입을 거쳐서 이야기가 전달되고 난 한참 후에야 비로소 여기저기서 글자로 옮겨 적히기 시작했다. 전달이나 기록 과정에서 착오도 있었지만 관련된 각 개인이나 집단의 주관이나 기호, 이해 관계도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녹아들게 마련이었는데,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각 종교의 경전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이렇게 뺄 건 빼고 보탤 건 보태고 고칠 건 고쳐서 나온 결과물들이다. 그 결과물이 특정 종교 집단에 의하여 절대시되고 있든 아니든, 이러한 경전들의 핵심은 사람들에게 어떤 교훈과 변화를 주려는 것이지 있었던 사실을 완벽하게 묘사,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말의 이러한 전달상의 불완전성 뿐만 아니라 말 자체의 불완전성을 알아챘는데, 이를테면 도덕경에서는, 길을 길이라 말할 수 있지만 그 길이 늘 같은 길일 수는 없으며 우리가 무엇에 이름을 붙일 수는 있지만 붙여진 이름이 늘 같은 것을 가름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신을 신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그리 불리는 신이 늘 같은 신, 영원한 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이르기를, 무릇 모든 상이 상이 아님을 알면 여래를 보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상이라는 것은 쉽게 얘기해서 어떤 이미지나 집착의 대상이다. 우리 각자가 말하는 신이나 부처,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진리도 일단은 각자가 갖고 있는 나름대로의 불완전한 어떤 상이며 일종의 허깨비다. 지금 우리가 펼쳐 들고 눈으로 훑어 읽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읖조리는 경전의 그 말씀들조차 궁극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우리를 진리의 저 언덕으로 건네 줄 방편이요 뗏목일 뿐, 진리 그 자체는 아니다. 저 언덕에 닿으면 버려야 할 뗏목이다. 그러나 강물을 건너려면 있어야 할 뗏목이다.
큰스님께서 주신 또 하나의 뗏목, 내 말에 속지 말라고 하신 마지막 당부가 생각난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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