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애비냐? 아빠야!

2005-06-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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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코나에서 열렸던 내적치유 세미나에 참석했던 동료가운데 덩치 큰 미국인이 있었다. 이미 성인이 되었지만, 흐느껴 울면서 고백했던 그의 상처는 아버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에 의하면, 자기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서 어머니를 때리고, 욕을 퍼붓고, 화가 나면 고무호수나 막대기 혹은 벨트를 풀어서 자기를 때렸다고 했다. 아버지에 대한 애정은 전혀 없고 오직 상처와 증오만 남아 있노라고 했다. 문제는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게 됐고, 또한 아버지에 대한 나쁜 선입관 때문에 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라는 것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하나님을 멀리 했노라고 눈물로 고백할 때 나는 마음으로 따라 울었다.
경우는 다르지만, 내게도 아버지에 대한 상처가 있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엄격한 분이셨다. 절제가 있는 분이라 주먹이나 손바닥으로 때리지는 않으셨다. 주로 회초리로 맞았는데 회초리도 내게 준비를 시키셨다.
한번은 꾀를 내어 가느다란 회초리로 준비를 했다. “부러지면 안 때리시겠지” 생각대로 회초리는 금방 부러졌고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아버지의 한마디는 나를 다시 공포로 밀어 넣었다. “회초리 다시 해와”
다른 때보다 더 많이 맞은 그날, 내가 배운 것은 “잔머리 굴리면 인생이 고달프다”라는 것이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배우게 된 인생의 지혜였다.
나는 한번도 나의 아버님을 아빠라고 불러 보지 못했다. 아버님이 용납을 하지 않으셨다. 아주 어릴 때부터 ‘아버님’이라고 불러야 했던 내게 정말 부러운 것이 있었다면 다른 친구들처럼 아빠라고 한번 불러보는 것이었다.
문제는 성경이었다. ‘아바 아버지’(갈 6:4)란 당시에 사용하던 아람어로서 아버지에 대한 아이들의 애칭이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있어서 빠삐, 빠빠, 파파, 대디, 우리말로는 아빠와 같은 분이라는 것인데,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이 무서운 매를 들고 내게 군림하시는 분이 아니라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시는 다정한 ‘아빠 하나님’이라는 것을 처음 느꼈을 때에 나 역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한번은 서울에 있는 한 교회의 초청을 받아 내적치유 세미나를 인도하면서 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어떤 경로로 아버님이 그 테입을 전해 들으셨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에 계신 늙으신 아버님께서 미국에 있는 나의 집에 전화를 하셨는데 마침 내가 집에 없었다. 대신 앤서링 머신에 녹음되어 있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밤늦게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애비냐? 아빠야!”
칠순이 훨씬 넘어 할아버지가 되신 아버님께서 성대 갈라지는 목소리로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시고는 서먹서먹하셨든지 다음 말을 잊지 못하고 엉거주춤 전화를 끊으셨다. 앞니를 또 빼셨는지 발음도 새는 그 쉰 목소리를 반복해 들으며 나는 한 주일을 꼬박 울면서 다녔다.
아버지날이 가까워 오니까 아버님이 더욱 뵙고싶어진다. 건강하셔야 될텐데…


우 광 성 목사
(은강연합감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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