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느 평신도의 성경이해’

2005-04-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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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태신앙을 갖고 태어났고 평생 교회를 떠난 적은 없다. 그러나 교회에서의 성경 해석은 으레 직역적이고 문자적인 것이어서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나에게 이것은 큰 거침돌로 작용했다.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나의 신앙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로 인한 참 신앙의 결핍을 늘 느꼈다.
어떻게 하면 성경을 보다 바르게 이해할 수 있고, 하나님의 참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나에게는 큰 과제였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그런 진리는 요원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런 어려움과 갈등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고 충분히 예견된 것이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이기 때문에 일점일획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쓰인 그대로 읽어야 하고 믿어야 한다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을 합쳐 각각 다른 시대적 배경과 서로 다른 역사적 여건 하에서 쓰여졌다.
신앙의 선조인 여러 성경 저자들의 각기 다른 하나님 체험을 기록한 신앙고백인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접할 수 있고,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직접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은유적인 의미로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지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된다.
예로 신약의 바울 서신이나 구약의 시편 혹은 잠언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분명히 글자 그대로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매개체 구실을 한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의 대상이라기보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렌즈’ 구실을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세상에 바뀌지 않는 것은 없다. 기독교도 예외일 수는 없다. 1960년대에 제 2차 바티칸공의회서 교회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선언한 것은 한 좋은 예이다. 그보다 불과 몇 십년 전만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기독교인도 많을는지 모른다.
어떤 특정 지역에서 3,400년서 1,900여 년 전에 쓰인 고전적 문헌을 일점일획도 가감 없이 쓰인 그대로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일 수는 없다. 더욱이 오리건 주립대학교의 종교학 교수인 마커스 보그의 말처럼 성경이 여러 가지 다른 ‘음성’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보면 성경이 담고 있는 여러 ‘음성’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에게 들려주는 음성을 가려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참 신앙으로서의 첫 걸음이 아닐까? 이것이 바로 성숙한 교인이 가질 수 있는 성경 해석법이 아닐까?


이 지 교 (평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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