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불교와 살림살이

2005-04-2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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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많은 미신 중에 불교를 믿으면 못 살고 서양 종교를 믿어야만 잘 산다는 얘기가 있다. 잘 살고 못 산다는 것에 여러 기준이 있겠지만 경제적인 면만 가지고 말한다면 불교를 믿으면 가난해진다거나 가난한 사람들만 불교를 믿는다는 얘긴데 과연 그런가?
부처님은 탐욕을 버리라고 하셨는데 곧이곧대로 탐욕과 물욕을 버리고서는 재산을 많이 모으기가 힘들 것이다.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부자가 천국으로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으니 도무지 경제관념이 없기로는 피장파장이다.
이타심을 기르고 실천하라는 가르침들이지만,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의 근간은 이와는 달리 우리 각자의 이기심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 대부분은 성인군자가 되기는 틀렸으니, 각자가 이기심과 욕심에 따라 행동함을 인정하고 허락하되, 이를 조화롭게 배양시켜 사회 전체의 부를 늘리는 것이 결과적으로 사회 전체 성원에게 더 많은 혜택이 돌아가게 된다는 것이고, 이것이 인위적으로 분배의 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보다 피를 보지 않고도 훨씬 복지의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어쨌든 불자는 눈앞의 탐욕을 뛰어넘어 세상을 건지려는 큰 욕심, 즉, 원을 세워 보살행을 하라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데, 이러한 원을 실현시키자면 그 방편으로서 깨끗한 부를 잘 쌓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청교도적인 청부와도 통하는 점이 있지만 가족과 종파, 국민 같은 현세의 인간 집단만이 아닌 산천초목, 날짐승 길짐승을 포함한 삼세의 모든 중생을 건지고자 하는 것이 보살행이므로 목표의 스케일에 차이가 있다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는 종교 때문에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일까?
시간적으로 따져 보면, 나라든 개인이든 잘 살 때도 있고 못 살 때도 있는데 이는 어떤 종교냐에 별 관계가 없다. 옛날에 인도나 중국, 페르샤 같은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자일 때도 있었는데 그 당시 독일이나 영국 등 유럽은 대부분 기독교였지만 참 가난했었다. 공간적으로 보아도 지금 기독교 국가 중에서도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가 있다. 필리핀은 기독교국이지만 아시아에서도 못 사는 축에 들고 남미 여러 나라도 그렇다. 일본은 불교국인데 세계에서 두 번 째 가는 경제 대국이다. 각 사회 내부에서 보더라도 불교도가 다 가난하지도 않고 기독교도가 다 부자도 아니다. 사우디 부자들은 다 이슬람교도들이다.
이렇듯 경제적으로 잘 살고 못 살고 하는 것은 종교하고는 직접적인 관련이 거의 없고 오히려 역사적 사회적 여건이나 제도, 본인의 성향, 탐욕, 노력, 유산, 요행, 업보 등에 더 좌우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종교적인 영향이라면, 어느 종교냐가 아니라, 어떤 종교라도, 그 당시의 사회 여건과 개인 성향에 요행히 어떤 쪽으로 잘 변용되어 돈 버는데 보탬이 되었는가에 있다. 물론 큰 원을 세워 정진한다면 부를 쌓는 데도 틀림없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원 익
(태고사를 돕는 사람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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