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을밤 꼬박 지샌 ‘독서삼매경’

2004-11-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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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주말나기
매주 책 2권씩 읽는 헬렌 박 씨

11월 중순, 만추다. 가을을 설명하는 수많은 수식어 가운데 하나는 ‘독서의 계절.’ 다른 세 계절을 다 놔두고 굳이 가을을 독서와 연관 지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한 번 오면 가야 하는 것이 태고의 진리임을 체득하게 되는 시기. 내면은 저도 모르게 옛 선인들의 지혜를 구하고자 책장을 뒤적이게 된다. 독서의 계절이란 말은 그래서 생겨났을 게다.
살림하랴, 회사 다니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한 헬렌 박(37·회사원)씨에게 역시 가을은 감기처럼 다시 찾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어올 때면 옷깃을 여미며 삶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되는 게 과연 무엇 때문인지 그녀는 알지 못한다.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면 설거지 마치기가 무섭게 마법처럼 잠에 빠져들던 그녀가 요즘 새벽까지 잠자리를 뒤척이는 것은 바로 이런 물음 때문이다.
이럴 때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흥미진진한 소설, 무라까미 하루끼의 아련한 몽상적 문체도 그녀를 사로잡진 못한다. 그녀는 중 고등학교 때 필독도서였던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달라이라마의 ‘행복론’처럼 평소 손을 대지 않던 책들을 꺼내 페이지를 넘겨본다. LA 한인들을 상대로 법문을 펼치기도 했던 틱낫한 스님의 ‘살아계신 붓다, 살아계신 그리스도’ 역시 구입한 지 약 1년 만에 비로소 활자들을 눈으로 구슬 꿰듯 따라갔다.
침대에 누워 스탠드를 켜고 책을 읽던 그녀는 남편의 잠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리빙룸으로 가운을 걸치고 발걸음을 옮긴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가 그녀의 홀로 깨어있는 밤을 위로하듯 들려온다. 오랜 만에 들었던 책장은 더디게만 넘겨지더니 요즘은 일주일에 두 권 정도도 뚝딱할 만큼 속도가 난다. 집에 사두기만 하고 모셔놨던 책들은 이번 가을에 다 섭렵했다.
영혼이 배보다 더 고픈 그녀는 오늘 오후 서점으로 발을 내딛는다. 활자 하나하나가 속속 머리에 박히는 모국어로 된 수많은 책들을 앞에 대하며 그녀는 산해진미 가득한 만찬에 초대된 객처럼 가슴이 벅차다. 그 가운데 그녀는 많은 사람들이 추천하던 김훈의 ‘칼의 노래’와 독특한 문체로 한국 문단에 바람을 일으킨 성석재의 단편 소설집,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집어 들었다.
알베르 까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을 처음 손에 넣었던 날, 그 보석 같은 문장을 음미하기 위해 그 길로 좀 더 조용한 곳으로 내달음질쳤던 것처럼 그녀는 주부하는 본연의 역할을 잠시 내려놓은 채 새로 구입한 책들을 들고 가까운 찻집으로 향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저자의 영혼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순간, 그녀는 짜릿한 행복에 몸을 떤다. 짙어가는 가을은 그녀로 하여금 아름다운 바람을 부추기고 있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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