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우리 아드님은 왕이로소이다”

2004-11-1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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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의 주말나기

‘수퍼대디’ 이철민 공학박사

타임지는 최신호에서 수퍼대디에 대한 기사를 커버로 다뤘다. 요즘 미국 아빠들은 퇴근하면 집안일을 하고 아이들을 돌본다. 한 세대 전 수퍼마마들처럼 수퍼대디는 직장과 가사 양쪽에서 모두 성공하는 것이 지상목표다.
여권운동 후기에 성년을 맞은 20대~40대초의 남성인 이들은 여권운동에 따른 사회변화를 당연히 여기고 자발적으로 적응한 사람들. 하지만 이들 역시 적잖은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직장에서의 불안전한 위치, 그리고 가사에 있어서의 역할이 뚜렷하지 않다는 게 그것이다.
이철민 씨(38, 유학생)는 하루 10-12시간을 연구실에서 씨름해야 하는 USC 공학박사. 지난 봄, ‘음성을 통한 감정 인식(Recognizing Emotions for Spoken Dialogs)’이라는 주제의 논문을 발표한 이 분야의 석학이다.
언뜻 생소하게 들릴지 모르나 기계가 사람의 영역을 대치한 현대 사회에서 응용할 곳이 많은 분야다. 전화회사나 항공회사의 자동응답 시스템은 예전의 교환원을 대신하고 있다.
이때 단지 이용객이 어떤 내용을 말했는가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말했는지 감정 상태를 기계가 인식할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터. 그가 이 연구를 시작한지도 벌써 약 3년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아직은 실험단계 수준이라 직접 시스템에 적용하기에는 아직 건너야할 산이 많다고 한다.
아들 윤상(2)군을 그는 유학생활에서 얻은 유일한 재산이라고 말한다. 연구실에서 가장 훌륭한 업적을 내고 싶은 욕심만큼 그가 또 하나 최고가 되고 싶은 분야는 바로 윤상이의 가장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다. 그 역시 이 시대를 사는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수퍼대디 신드롬을 앓고 있는 것.
학교 연구가 바쁘다보니 물리적으로 아들과 지낼 시간이 많지는 않다. 하루 저녁은 집에 돌아온 아빠에게 윤상이가 막 달려오며 뽀뽀를 하는데, 괜히 눈물이 핑 돌더란다.
내리사랑이라 했는데 아빠가 주지 못한 사랑을 제가 먼저 주겠다는 듯 달려든 그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다고 한다. 두 살이 넘었는데 아직 엄마, 아빠란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할 만큼 윤상이는 말이 늦다. 그럴 때마다 그는 혹시 자신이 자주 놀아주지 못해 그런 건 아닌가, 미안한 마음뿐이다.
학교 연구실에서 머리 터지는 시간을 보낸 후에는 으레 아무 생각 없이 쉬고만 싶어지지만 그는 가능하면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애쓴다. 유모차에 윤상이를 태우고 아파트 주변의 공원을 산책하기도 하고 집에서는 윤상이가 이해하든 하지 못하든 책을 읽어주며 도리도리, 짝짜꿍도 시킨다. 아이들 쫓아다니며 밥을 먹이는 다른 엄마들을 그는 동병상련 앓듯 이해한다. 그 역시 식사 때가 되면 자기 입에 밥을 넣기보다 윤상이 떠먹이느라 바쁘기 때문이다.
학교 미술 시간에 아버지 그림을 그리라 했더니 이부자리에 누워있는 남자를 그려오는 아동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자기 눈에 비친 아버지가 항상 피곤에 절어 누워있으니 그런 이미지를 그릴 수밖에. 갈수록 아들들에게 동일시할 수 있는 남성상이 없어진다는 우리 세대. 윤상이는 아빠로 인해 더욱 조화된 인격을 가진 소년으로 자라날 것 같다.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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