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2004-09-14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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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기념일

아직 신혼기였을 때 우리는 결혼기념일이 되면 주로 여행을 했다. 그러다가 하나 둘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자라나고 하면서 어느덧 가족 여행 겸, 휴가 겸 아이들까지 합세하는 야단법석 여행길이 되었는데 12주년을 맞는 올해 기념일을 앞두고 우리는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복잡한 여행 대신 기도원에 가서 침묵하는 시간을 가지기로 하자’는 것이었다. 가톨릭 신자들이 시끄러운 일상을 피해 고요함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의 피정과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이 마침 일주일 동안 빅 베어 캠프에 가있는 사이, 아내는 먼저 짐을 챙겨 우리가 피정 장소로 정한 수녀원으로 떠났다. 나는 그간의 선교 여행으로 환자 스케줄이 밀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동행하지 못하고 주중에 휴진하는 날에 합류하기로 일정을 짰다.
아내가 미리 차를 운전하고 갔으므로 나는 이틀 후, 태평양을 끼고 바다를 바라보며 가는 앰트랙을 타고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는 차 한 대로 함께 운전을 하며 시간을 가지기로 했다.
주변에서는 다들 ‘싸우고 집나간 마누라 찾으러 가는 거지?’ 하고 놀려댔지만 나에게도 힘차게 앞만 보고 내달려온 세월 가운데 이 같이 조용한 일단정지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머지 하프 타임을 정리해보는 것이 꼭 필요한 참이었다. 수녀원은 샌타바바라 가기 전, 햇살 환한 포도주농장 지대 조용한 마을에 숨은 듯이 앉아 있었다.
돌담 입구를 지나 한참 더 안으로 들어가니 고색창연, 아름다운 석조 건물이 나온다. 이곳은 종파를 초월하여 묵상의 시간을 갖기 원하는 일반인들을 위하여 일주일에 며칠씩만 개방하는 게스트 숙소이다.
우리가 있는 동안에는 안식년을 맞아 돌아온 네비게이토 선교회 소속의 요르단 지역 선교사 한분과 미네소타에서 오신 장로교 목사님 한분을 만났다.
12개의 게스트 룸마다 데코레이션을 달리 하고 쉴 수 있는 공간과 튼튼한 목조 침대, 책상을 마련했는데 이불깃 하나하나 섬기는 분들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지는 곳이다.
방의 위치에 따라 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들이 모두 색다르다.
아래층에는 신앙서적으로 가득 찬 도서실과 식당과 부엌이 있다. 나이 드신 미국인 수녀님 네 분이 관리하는데 과수원에서 손수 기른 무공해 야채와 과일, 방금 낳은 따뜻한 계란들을 재료로 한 식탁에는 사랑과 감사함이 가득하다.
우리가 시간을 가장 많이 보낸 곳은 역시 채플과 개인 기도실이다. 온갖 나무가 숲을 이룬 사이로 오솔길을 지나면 채플이다. 채플은 십자가상이 달린 강단 쪽 한 면 전체를 유리로 했는데 바깥에는 우거진 수목이 유리창을 푸르르게 색칠하고 있다.
정적에 싸인 채플의 커다란 통나무 문짝을 열고 들어선 순간, 강단 높이 걸리신 예수님의 고난당하신 모습. 훅! 하고 숨이 멈추는 듯 했다.
개인 기도실은 숲 속 저 끝으로 검소하게 지어진 다락방 같은 공간이다. 어찌나 조용한지 나의 기도소리보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잘 들렸다. 이 수양관에서는 특히 QT와 관상 기도를 권유하고 있는데, 우리가 기도하는 동안 받은 관상 기도의 주제어는‘용납’이었다.
밤이면 우리는 테라스에 나가 무수히 떨어져 내리는 하늘의 별을 보았다. 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서로 침묵했지만 가장 깊은 대화를 나누었던 결혼기념일이었다.
나에게도 힘차게 앞만 보고 내달려온 세월 가운데 이 같이 조용한 일단정지의 시간을 가지면서 나머지 하프 타임을 정리해 보는 것이 꼭 필요한 참이었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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