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좁지만 넉넉한 행복

2004-09-0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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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함께 휴가를 떠나기로 했다. 목사의 자녀로서, 부모를 늘 교인들에게 양보해야 하는 일에 익숙해있는 아이들과 모처럼 실컷 웃고, 놀고, 얘기하고픈 마음에 일찍이 가족휴가를 계획했다. 개학을 앞둔 8월의 마지막을 가족을 위해 떼어놓고 옐로스톤 국립공원을 다녀오기로 했다.
떠나기 전날, 아이들은 물었다. “아빠, 이번 휴가에서 뭐 하실거예요?” “음~ 너희들과 놀고, 자전거 타고, 씨름하고, 음~” 그거면 아이들에게는 충분했다. “와” 소리를 지르면서 기대에 부풀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3,000 마일 가까이 운전을 하며, 차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야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함께 노래 부르고, 퀴즈도 내고, 무서운 이야기도 돌아가며 하고, 잠도 자고, 싸우고, 울고, 혼나고... 그러면서 다녔다. 큰 아이는 코닥 모멘트를 놓칠세라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마침 떠나기 두주 전, 큰 아이가 이모로부터 생일선물로 받은 카메라는 14불짜리 싸구려였지만, 우리의 행복을 담아 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행복한 얼굴로 사진을 찍어 대는 모습을 오히려 사진에 담아야 하는데 싶었다. 짐을 잔뜩 싣고 네 식구가 함께 앉은 좁은 차 속은 서로의 체취를 한껏 느끼면서 진한 행복을 누리기에 충분한 공간이었다.
마침 머물렀던 곳에는 아주 작은 반쪽 짜리 식탁이 있었다. 식탁을 크게 넓힐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작은 식탁을 그대로 이용했다. 반찬을 많이 놓아야 할 필요도 없었고, 많이 놓을 반찬도 없었다. 아이들은 어찌나 잘 먹는지, 아내는 식구들이 평소보다 더 잘 먹는다고 좋아했다. 국수 종류가 자주 등장했지만, 좁은 식탁에서 네 식구가 서로 코를 맞대고 먹는 맛이란 웬만한 일류식당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려서 단칸방 전세 집에 살던 때가 기억난다. 단칸방이었지만, 그 쓰임에 있어서는 다양했다. 손님이 오면 리빙룸이 되었다가, 저녁을 먹을 때는 다이닝룸이 되었다가, 밤에 요강을 들여다 놓으면 화장실이 되었다가, 침실이 되기도 했다. 장롱 옆에 네 식구가 드러누워 겨우 발뻗고 잘만한 구들방이었지만 언제나 식구들이 단잠을 자는 데는 넉넉한 공간이었다. 부모님은 어떻게 부부생활을 하셨는지 지금도 궁금하기만 하다. 좁은데 사는 게 익숙한 만치, 서로 함께 사는데도 익숙했다. 서로 부대낀 만치 서로 친밀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한국 사람들에겐 유난히 ‘정’이라는 것이 있는가 보다.
미국에 살면서, 갈수록 큰 공간에 익숙해져 간다. 사람이 집에 있는지 없는지 조차도 알 수 없어, 집안에서도 셀룰라 폰으로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산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었다. 차도 커지고, 집도 커지고, 점점 사는 공간은 넓고 여유가 있는 만큼, 거기 사는 사람들의 관계에서 친밀감을 느끼기는 쉽지 않은 것 같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 아니라, 서로의 숨소리를 느끼며 서로의 존재가 모두의 기쁨과 행복이 되는 그 친밀함이 그립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이 제방에 가질 않는다. 한 침대에서 서로 엉켜 며칠을 더 보내야할 것 같다.

김 동 현 목사 (언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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