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재철 목사의 짧은 글 긴 여운

2004-08-1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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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부요함

언제부턴가 우리 주변에선, 부모가 돌아가신 뒤에도 형제들이 화목하면 부모가 가난하여 남긴 유산이 없기 때문이란 말이 돌고 있습니다. 부모의 유산으로 인해 등지거나 심지어는 원수지간이 된 형제가 그만큼 많은 까닭입니다.
실제로 형제끼리 유산다툼을 벌이고 있는 집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자식과 자식 사이를 갈라놓는 유산이라면 차라리 남기지 않음만 못한, 백해무익한 흉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부산에서 목회하고 있는 젊은 K목사님의 부친이 단 한 푼의 유산도 없이 훌쩍 세상을 떠나셨을 때 막내이던 김 목사님의 나이는 겨우 세 살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졸지에 다섯 자식을 거느린 과부가 된 어머니는 병약하기 짝이 없어 당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습니다. 결국 초등학생이던 큰형과 큰누나가 머슴살이와 식모살이로 어머니를 포함, 여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졌습니다.
작은형과 작은누나 역시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가사를 도왔습니다. 4남매가 힘을 똘똘 뭉쳐 어머님이 돌아가시기까지 병 수발을 하고, 막내 동생인 김 목사님을 대학 공부까지 시키느라 자신들은 초등학교 졸업 혹은 중퇴로 만족하였습니다.
그 이후 세월이 흘러 5남매는 모두 결혼,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5남매의 형제우애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깊어지기만 했습니다. 특히 큰형과 큰누나에 대한 동생들의 존경심은 절대적입니다.
식모살이로 동생들을 키우느라 초등학교를 중퇴해야 했던 큰누나는 그로 인해 아직까지도 한글을 읽는 것조차 서툴지만, 그러나 동생들에게 그런 건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아니 그렇기에 동생들은 그 누나가 더없이 자랑스럽기만 합니다. 만약 그 5남매가 막대한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았더라면 결코 누릴 수 없는 형제사랑입니다.
가난을 목적으로 삼을 필요도 없지만, 그렇다고 현재 주어진 가난을 두려워할 필요도 전혀 없습니다. 가난 속에는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부요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로 하여금 때로 가난의 터널을 통과하게 하시는 까닭입니다.


- 2004년 7월 ‘쿰회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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