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범수의 선교하는 삶

2004-07-1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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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연습

두 사람이 다투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다음 세 마디를 잊지 말고 먼저 상대에게 말하도록 하십시오.’ 그 세 마디는 I’m sorry.(미안해) I’m wrong.(내가 잘못 했어) I love you. (사랑해) 였다.

토요일 오후, 조셉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글렌데일의 조용한 미국 교회. 정원에는 흰 장미넝쿨이 그늘을 만들고 코끝에 스치는 바람은 향기롭다. 이 아름다운 날에 어여쁜 신부와 나란히 단 위에 선 청년은 P 목사님의 맏아들이다. 젊은 커플은 예식의 주례를 아버지에게 부탁했다.
꽃처럼 활짝 피어난 신부가 신랑과 주례 앞으로 걸어나온다. 드디어 P 목사님은 사랑하는 아들과 그 아들의 사랑하는 신부 앞에 마주서서 애정 담긴 눈길로 그들을 바라본다. 나 역시, 아들을 자랑스럽게 키워내신 P 목사님의 마음이 되어, 예식이 끝날 때까지 내내 기도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축복했다.
아들에게 주실 말씀이 얼마나 많을까? 평생 해오신 설교와 강단과 교단의 수많은 강의 내용과 삶의 지혜를 다 전해주고 싶으실 목사님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하객들은 주례자의 말씀을 기다렸다. 그러나 영어와 한국어를 번갈아 사용하면서, 참석한 모든 이에게 불편이 없도록 배려하신 P 목사님의 말씀은 짧고 간결했다.
‘인생에는 좋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렵고 힘든 날이 올 것입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 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에 다음 세 마디를 잊지 말고 먼저 상대에게 말하도록 하십시오.’
그 세 마디는 I’m sorry.(미안해) I’m wrong.(내가 잘못 했어) I love you.(사랑해) 였다.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해보니 싸움이 있은 뒤에 절대로 하기 싫었던 말이 바로 그 세 마디였다. 평생 연애하는 감정만 가지고 목숨이라도 다 바쳐 기꺼이 희생하며 살아갈 것 같았던 처음의 감정은 이글이글 분노로 바뀌었고 세상이 끝난대도 절대 미안하다는 말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상대가 나에게 해야할 말이지 나의 대사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나는 온 몸이 산산이 폭발할 것 같은 화를 참는데 첫 10초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온 지구, 오대양 육대주라도 단숨에 널름 삼키고야 말 것 같던 분노가 첫 10초가 지나고 나면 약간 작아져서 아메리카 대륙 크기로, 다시 다음 10초 뒤에는 집 하나 만한 사이즈로 줄어드는 것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면 절대 할 수 없던 그 세 마디를 해야한다고 마음속에서 외치시는 ‘그 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하기 쉬운 일이라면 그건 ‘순종’이 아닐 것이다.
1살에 노르웨이에 입양되었던 하워스(한국이름 김 미숙, 31세)라는 여인이 쓴 시는 나에게 분노 뒤의 참된 ‘용서’를 가르쳐준다.
<그날도 오늘처럼 이렇게 햇살이 따뜻했나요? 30년 전 봄, 분홍색 포대기에 싸여 내가 버려졌던 날/ 노란 머리, 파란 눈의 자상한 양부모 부족함 없는 생활에도 철이 들면서 가슴 한구석 질문 하나, 왜 나를 버렸나요? 나를 사랑하지 않았나요? 미워, 무책임해! 소리도 질러봤지만 원망이 커질수록 그리움도 커졌어요/ 지난 가을 딸을 낳아 처음 품에 안는 순간 알게됐어요. 아이를 떠나보내는 어머니의 가슴은 피멍과 상처로 가득하리란 것을/ 당신에게 하고픈 말이 있어 30년만에 이렇게 한국을 찾아왔어요/ 이해해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는 것. 이젠 스스로를 용서하세요/ 처음으로 소리내어 불러보는 이름, 어머니! 보고 싶어요.>
그렇다. 용서란 상대방에 대한 내 태도의 결정이라는 말을 나는 믿는다.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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