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모의 마음 철드는 시간

2004-07-02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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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초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교단 총회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날 아침, 왼쪽 얼굴에 마비가 왔음을 알았다. 이미 바닥난 체력에 긴 시간의 자동차 여행과 빡빡한 일정, 계속되는 불면, 긴 팔 옷을 입고도 추울 정도로 빵빵하게 틀어놓은 행사장의 에어컨이 무리가 된 듯했다. 일행들이 걱정할까봐 내색도 못하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도 멀고 고통스러웠다.
날벼락이 이런 것일까? 철판을 깔아놓은 듯 뻣뻣한 얼굴, 움직이지 않는 눈꺼풀로 인해 자꾸만 눈동자가 마르고, 세수나 샤워를 할 때면 아무리 조심을 해도 비눗물이 사정없이 눈으로 들어간다. 입이 한쪽으로 쏠리고 뻣뻣하니 턱 관절이 아파 씹는 일이 곤욕이고, 물을 마시면 주루룩 흘러내리니 가관이다. 마비된 혀와 입술이 수도 없이 마르고 터지고 벗어지니 아무 맛도 모르겠고, 먹고픈 의욕도 없다. 손끝만 스쳐도 악 소리 나게 아픈 얼굴 근육, 대못을 커다란 망치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것 같은 끔찍한 머리의 통증, 온 몸의 피가 다 빠져나간 듯 기운이 없고 어지러우니 일어나 앉을 수도 없다.
처음엔 현실이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었고, 모든 것이 화가 나고 온통 섭섭했다. 결국엔 감당할 일이 막막해서 두려웠다. 가족들을 안심시키느라 반쪽 얼굴로 장난을 치다가도 혼자 있을 때면 자꾸만 눈물이 쏟아졌다. 만만찮은 형편이지만 주어진 일을 감당한다고 나름대로 애를 썼는데 무슨 연유인지 답답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지금 내가 얼마나 귀한 시간 안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지만.
너무도 몰랐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임의로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음을. 수없이 눈을 깜빡이고 감고 뜨고 하는 것, 흘리지 않고 밥을 먹고 물을 마실 수 있는 것, 함박 같은 웃음을 웃고, 이마에 주름 잡으며 인상을 쓰는 것까지... 이 엄청난 기적과 축복을 아무런 감사도 감격도, 값도 없이 너무나 당연하게 누려왔다. 세상을 내가 살고 있다고 여겨왔다.
또다시 나를 포기하며, 남의 고통쯤에는 외눈하나 깜짝 않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에 여전히 따뜻한 가슴과 착한 손길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인해 이웃을 향한 새로운 꿈을 품게 되었다. 특히 “이모는 누가 뭐래도 영원한 공주”라며 힘들고 아픈 마음 감추고 밤낮 애쓰는 조카딸이 큰 힘이 되었다.
이름만 다를 뿐 맛은 똑같은 음식을 만들어준 그 놀라운 솜씨를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또한 늘 몸이 약한 아내를 끔찍이 돌보면서도 ‘돌팔이 한의사’라고 놀림을 받아온 남편, 땀을 뚝뚝 흘리며 침놓고, 뜸뜨고, 찜질하고, 약 지어 먹이고, 뜬금 없는 투정까지 받아주느라 고생이 많은데, 덕분에 회복이 빠르다니 아, 이제는 ‘명의’라고 불러야 할까보다.
앓고 나면 부쩍 크는 아이들처럼,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아픔은 성숙한 도구 되기 위한 ‘철드는 시간’임이 분명하기에 귀하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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