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모의 마음 손으로 말해요

2004-06-04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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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유년 주일학교에서 봉사하게된 나는 과거의 근사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가벼운 마음으로, 조금은 잘난 척 하는 마음으로 기분 좋게 첫날을 맞았다. 그러나 교실 안의 현실을 파악하고 당황하고 아득한 기분이 들기까지는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영어만 하는 글로리아, 한국말만 하는 희선이와 태훈이, 이것저것 섞어 겨우 말은 하지만 아직 글씨를 모르는 찬양이, 거기에 덧붙여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를 가진 존까지... 눈앞이 캄캄했다.
웃지 못할 이 현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간절한 기도로 지혜를 구하며 모두에게 같은 이해와 가르침을 주기 위해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했다. 다행히 기대 이상의 성과와 기쁨을 맛보며 몇 달이 지나갔다. 스스로를 대견해 하며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을 즈음, 늘 부담으로 남아있던 존이 하나의 현실을 깨우쳐 주었다.
2세 때 심한 감기와 중이염을 앓은 후 청각장애를 갖게된 존은 4세 때 미국에 와서 올해 7세가 되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손짓만으로 그럭저럭 의사가 통했는데, 학교에 다니면서부터는 수화(手話)로만 말을 하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고, 필요한 말을 해줄 수도 없으니 답답했다. 그래도 필요한 한두 마디를 엄마에게 배우고, 그림이나 온갖 자료를 동원한 덕분에 그 동안은 별 문제없이 지내왔는데, 지난 4월 둘째 주일에 드디어 문제가 발생했다.
그날도 말씀에 대한 설명을 마친 후 그에 따른 활동을 하는 시간, 모든 아이들이 나누어준 과제를 열심히 하고 있는데 갑자기 존이 소리를 질렀다. 샘플만 보고는 이해할 수 없으니 더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아차, 이 일을 어쩌지?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아이는 울상이 되어 더 크게 소리를 지르고 ... 쩔쩔매며 궁리가 분분한데 한참을 보채던 아이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이상해서 바라봤더니 세상에, 눈물이 가득 고인 빨개진 두 눈으로, 실망으로 인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무너지는 마음을 간신히 수습하고 조심스럽게 다가가 한참을 안아주어 진정시킨 후 아이의 손을 포개 잡고 함께 과제를 끝마쳤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그날의 일과 아이의 눈빛이 마음에서 떠나질 않고, 차마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질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마음을 정한 날, 밀알선교회의 수화교실 광고를 보고 등록한 후 두 번째 다녀왔다.
아직은 모르겠다.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 이 아이를 내게 맡기셨는지를. 하지만 내가 해야될 일이라면 제대로 감당하고 싶다. 언제쯤이나 꼭 필요한 말, 하고싶은 말을 마음껏 해줄 수 있을지 까마득하지만, 이미 우리 안에서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반드시 또 한번의 멋진 일을 이루실 것을 믿는다. 급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제대로 따라주지 못하는 기억력과, 한없이 뻣뻣한 손가락이 한심하지만 머잖아 맛보게될 환상적인 기쁨을 기대하며 열심히 손을 움직여 본다. A-B-C-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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