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그림으로 표현된 ‘한편의 시’

2004-05-28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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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턴 사이먼 뮤지엄 ‘인도 세밀화’전

언제부턴가 운전을 할 때면 길거리의 배너를 유심히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가끔씩 신문을 들여다볼 짬도 없을 만큼 바쁠 때라도 온 도시에 물결치는 배너만 쳐다보면 LA 어느 곳에서 무슨 공연이 있는지, 또 어떤 전시가 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인도 세밀화 배너가 길거리에 걸린 지도 이제 약 2달이 되어 간다. LA에서 가장 소장품이 알차기로 유명한 노턴 사이먼 뮤지엄(Norton Simon Museum)에서 지난 4월 2일부터 마련한 전시의 주제는 ‘그림으로 표현된 시(Painted Poems: 라메쉬와 우르밀 카푸르 컬렉션 중 라즈푸트 세밀화).
시는 언어로 표현된 예술이요, 그림은 그 매체가 색채와 형태로 시와는 코드가 다른 예술 장르다. 하지만 인도의 세밀화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림으로 표현된 시’라는 표현이 본질을 꿰뚫은 서술임을 알게 된다.
최승희(38, 주부)씨는 지난 주말 큰딸 새라(13) 양과 함께 인도 세밀화를 전시하고 있는 노턴 사이먼 뮤지엄을 찾았다. 4월초부터 가야지 벼르고 있었는데 근 두 달이 지나서야 겨우 뮤지엄 나들이를 하게 된 것은 남들과 꼭 같은 흔한 변명, 생활이 바빠서였다.
유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과 ‘지구별 여행자’를 읽고 난 뒤 그녀는 인도의 문화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됐다. 인도의 세밀화 배너가 그녀의 시선을 끌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게다.
인도에서의 그림은 벽에 걸어두고 즐기는 것이 아니었다. 그 내용이 남녀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한 것이든 궁정의 평범한 생활상을 그린 풍속화이든, 아니면 성스러운 신화적 내용이든 간에 그림들은 작은 종이에 그려져 나무 커버 속에 보관되었다. 멋진 전통 의상을 한 힌두의 왕자가 손님을 맞으며 “그림 보여줄까?”하고 꺼내 들었던 작품들을 뮤지엄이라는 열린 공간에서 대하는 느낌이 색다르다.
이마에 빈디를 찍은 아름다운 인도 여인들이 걸친 색색의 화려한 사리들은 그림 속에 그 문양까지 세밀하게 표현돼 있다. 크리슈나를 맞는 라다의 가슴은 ‘티치노의 비너스’만큼 관능미가 넘친다. 평면과 공간이 결합된 듯한 인물들의 시선,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역시 인도 세밀화와 이집트 고대 벽화에 빚진 바가 큰 것 같다.
이번 전시에서는 1450년부터 1900까지의 라자스탄과 파하리 학파의 그림 85점을 살펴볼 수 있다. 세밀화들은 라마야나, 바가바타푸라나 등 힌두교의 신화, 또는 궁정의 생활상을 그린 것들이다. 그림 외에도 도자기와 생활 소품 등 매체가 다양하다. 인도 세밀화는 이네즈 죤슨의 신비한 작품 세계(The Magical Worlds of Ynez Johnston)와 함께 오는 8월 23일까지 전시된다.
노턴 사이먼 뮤지엄의 주소는 411 W. Colorado Bl. Pasadena, CA 91105. 전화, (626) 449-6840. 입장료는 성인이 6달러. 매주 화요일은 휴관. 수-월요일 정오-오후 6시. 금요일은 정오-오후 9시까지 문을 연다. 수련이 둥둥 떠 있는 정원도 꼭 들려보길.

<박지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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