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봄의 정원 화폭에 옮긴 봄, 봄

2004-03-1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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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화폭에 옮긴 봄, 봄

따스한 바람이 부는 주말 오후 야외 가든을 찾아 아름다운 꽃을 화폭에 담고 있는 브라이언 안씨. 남가주에는 화폭에 담기 좋은 정원들과 들판이 곳곳에 있다. 또 아마추어 화가들을 위한 클래스들도 많이 열린다.

1907년 6월15일 르 피가로 지에 실린 스플랑두르(Splendours)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마르셀 푸르스트는 지베르니(Giverny)에 있는 끌로드 모네의 정원 방문을 앞둔 가슴 가득한 기대를 화려한 문체로 적고 있다. 분홍과 하늘색의 꽃들이 조화롭게 피어나도록 디자인한 지베르니의 정원은 곧 모네의 아틀리에였고 캔버스였다.
1891년 지베르니의 농가를 구입한 모네는 틈틈이 못을 파고 꽃을 심어 정원을 꾸몄다. 수련, 수선화, 튤립, 라일락, 아이리스, 백합, 장미... 형형색색의 꽃들은 100년 전 위대한 화가의 예술 혼을 자극하던 때와 조금도 다름없이 오늘도 그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매일 아침 이른 시각과 오후 무렵 단지 수련 봉우리가 피고 지는 것을 관찰하기 위해 수상정원에 들렀던 모네. 그의 붓을 팔레트에서 캔버스로 급히 움직이게 한 영감은 홀로 정원에 머물던 고요한 순간에 일어났다. 눈이 멀게 된 후에도 그는 기억의 조각들을 짜 맞추어 그림 그리기를 계속했다. 그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작품 속 찬란한 빛은 우리들을 현혹시킨다.
봄날의 주말 오후 브라이언 안(50, 디자이너)씨는 지베르니의 정원에 이젤을 세워놓고 그림을 그리던 모네가 된다. 꽃처럼 아름다운 오브제가 또 있을까. 프로방스 지방보다 더 강렬한 남가주의 햇살은 꽃들의 축제를 더욱 화려하게 연출해 낸다.
주말이면 만사 제쳐두고 꽃들이 만발한 정원에서 붓을 놀리는 그는 가장 예술적인 방법으로 봄을 즐기는 상춘객. 제철을 맞아 일제히 합창을 부르듯 고개를 내미는 꽃들은 마치 영원히 비밀을 알 수 없는 마법을 부리는 게 아닐까.
데스칸소 가든, 칼스배드의 플라워 필드, 게티 센터의 어윈 정원은 모두 자연이라는 화가가 꽃을 물감으로 삼아 그려낸 예술 작품들. 밝은 노랑, 선명한 오렌지 색, 밝은 장미색, 주황, 분홍, 진홍, 하양, 보라 그 밖의 색깔들이 물감을 쏟아 부은 것처럼 뒤섞여 캔버스의 유화보다 더 아름다운 그림을 만들어 내고 있는 모습은 오래도록 향유하고 싶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가끔씩 캔버스 앞에서 붓을 놀리는 그의 모습이 근사해 보이는지 걸음을 멈추고 캔버스를 들여다보는 이들도 있다. 처음에는 그런 시선들이 무척 거슬렸지만 이제는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조차 그림을 구성하는 요소로 받아들인다.
작은 크기의 종이에 그리기 시작한 수채화는 반나절이면 완성된다. 속이 들여다보이듯 투명한 느낌은 봄의 싱그러움을 표현하기에 제격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빈센트 반 고흐처럼 물감을 나이프로 여러 겹 찍어 발라도 그 열정을 표현하기에 부족해 보이는 꽃들도 있다. 플라워 필드나 퍼피 꽃 만발한 랭카스터의 언덕으로 화첩 원정을 나설 때면 그는 조르주 쉬라처럼 점묘 기법을 시도해 색채를 표현하기도 한다.
꽃과 정원을 화폭에 옮기는데 열심이었던 또 다른 화가는 빈센트 반 고흐. 파리에서 사귄 정신과 의사 가세의 정원에서 그는 또 한 점의 걸작(Le Jardin du docteur Gachet)을 낳았다. 그로부터 1년 전이었던 1889년, 셍레미의 셍폴 정신병원 정원에서 그렸던 작품이 그 유명한 아이리스(Les Iris). 꽃들을 그리러 봄철 주말을 정원에서 보내고 나면 어느새 끝을 짜내야 할만큼 노랑, 주황, 빨강, 초록 물감이 많이 사용한 걸 깨닫는다. 인생이 봄날의 꽃들처럼 고운 색깔들로만 장식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꽃의 피고 짐은 여전히 요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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