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3.1절에서 보여진 기독교정신

2004-03-0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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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3.1절 8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에 대하여 온 민족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함께 일어난 뜻 깊은 날이다.
독립운동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당시 기독교는 민족을 위하여는 종교를 초월하여 힘을 기울였다. 3.1절의 실질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약 한달 전인 1919년 2월8일 오후 2시 일본 도쿄 한국 YMCA에서 400여명의 청년들이 모여 독립선언문 낭독대회를 가진 것이었다.이 대회는 기독교 유학생들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이 모임은 기도로 시작되었다.
기독교에서 불을 붙인 독립운동은 천도교와 불교로 이어지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종교를 초월하여 범 민족적으로 확산되게 되었다. 3.1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기독교,15인이 천도교, 2명이 불교대표였다. 3·1운동 당시 구속자는 수는 천주교가 65명, 불교 220명, 유교 346명인데 비해 기독교는 3,374명이 구속되었고, 파손된 교회는 80개소, 무너진 기독교 학교가 7개소나 되었다.
기독교가 민족을 위하여 귀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민족 모두의 선과 의를 위하여는 기독교인이라는 폐쇄적인 틀을 과감하게 벗어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의 영향력은 그 당시 한국인의 비율과 기독교인의 비율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1919년 당시 한국의 인구는 1,700만명 정도였으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도대체 30여만명에 불과했다. 그러니까 비율로 본다면 전 인구의 1.8%에 불과 하였지만 민족을 위하여 공헌한 바는 지대한 것이었다. 비단 독립운동 뿐 아니라 근대 한국 역사에서 교육 복지 문화 등 사회에 끼친 기독교의 영향이 지대한 것이었음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지난 날에 비추어 오늘의 기독교를 비교해 본다면 무엇인가 잃어 버린 것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기독교인들의 숫자를 인구비율로 본다면 본국에서는 25% 이상, 이곳 이민 사회에서는 거의 50%까지 보는 견해도 있다. 그렇다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지난 날의 교회의 공헌을 생각할 때에 자성하는 마음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언젠가부터 교회들이 개교회주의에 빠져들면서 사회에 대한 관심이 흐려지고 개인구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사회속에서의 사명에 무관심해 진 것이 아닌지. 교회의 담을 높이고 세상과 분리하는 것이 거룩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보다는 세상에 물들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지난 날 기독교의 선배들은 민족과 사회를 위하여 사랑과 협력의 손길을 과감하게 내밀었다.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은 교회가 속한 사회에 진정 축복이 되는 것이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림 형 천 목사 (나성영락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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