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사랑은 시인을 만들고’

2004-01-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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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종 기 목사
(충현선교교회)

2003년의 마지막 날, 새벽기도를 마치고 늘 가보고 싶었던 한 장소를 찾아가 보았다.
글렌데일에서 코리아타운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실버레이크(Silverlake)였다. 대지는 서서히 동터오고 있었고, 호수 주변의 동네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 호수를 돌아보면서 희열에 잠겼다. 새벽 찬바람에 물새들을 품고 멀리 북쪽 윌슨 마운틴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호수를 환희 속에서 감상하며 걸었다.
공부하면서 10년을 살았는데도 나는 이 아름다운 호수를 스쳐 지나갔을 뿐, 내려서 구경할 정신적 여유가 없었다. 맑은 물과 새들과 좋은 배경, 그리고 산꼭대기에 있는 이 아름다운 호수를 지나쳐보면서도 한 번도 들르지 않는 무례함으로 또 다시 몇 년을 살았다니...
유학생이라는 나그네에게는 약 30분 이 호수의 모습을 즐기는 사치가 힘들었던 것이다. 아니 그 여유를 귀찮게 생각한 마음의 가난과 메마름이 더욱 슬펐다. 사랑하는 아내를 향하여 시를 쓰던 후배도 있던데... 아니 나는 청년시절 아직 만나지 못한 아내를 향하여 사랑과 축복의 시를 썼던 화려한 과거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이토록 내 마음에 시심을 허락하는 여유도 주지 못하였음이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목회자로 다시 남가주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으면 이 지역에 오랫동안 거주하게 되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전에 가지지 못한 마음의 변화가 생겼다. 이곳에 사는 분들과 땅을 더욱 자세히 보게 된 것이다. 가난한 나그네에게는 사람과 땅을 자세히 볼 여유가 없다. 그러나 이제는 이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할 사람으로서 같은 환경을 살아가는 이민사회와 살아야 할 토양에 대하여 감히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잃어버렸던 시인의 마음이 다시 꿈틀거리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땅을 향한 의미가 새로워지게 되니, 그것이 나의 마음에 봄을 가져왔다. 사랑은 시인의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에리히 프롬이 말한 바, 건전하고 생산적인 사랑은 관심과 책임과 존경과 지식이라는 마음의 태도를 불러일으킨다는 말이 새로워졌다.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청년을 시인으로 만들 듯이, 예루살렘을 사랑함이 시편기자에게 시적 영감을 주듯이, 다윗의 하나님 사랑이 주옥같은 시편을 낳듯이, 이민사회에 대한 변화된 마음의 작은 사랑은 시인의 마음을 내게 불러 일으켰다.
투철한 논리와 합리적 이성의 터진 틈 저 깊은 곳으로부터 시인의 마음이 나를 적셔오고 있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하였다. 새로운 마음의 변화에 대한 자각과 발견이 나를 기쁘게 하였다. 이민사회를 노래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그 땅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갈 백성의 영광을 노래하고 싶은 생각에 마음이 설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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