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2002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에

2003-12-13 (토)
크게 작게
한영호 목사

2002년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무언가 아이들에게도 시골스럽고 푸짐하며, 기억에 남을 만한 추억거리 하나 정도를 만들어주고 싶었다.
꽤나 많아진 형제 자매들의 특별한 음식을 챙긴다는 것은 누구나 놀고싶고 느긋해지고 싶어하는 크리스마스 이브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눔은 형제들끼리 주방장을 정하고 설거지, 주방 도우미 등을 스스로 조를 짜서 해나간다. 어떤 때는 엉망인 음식에, 엉망인 설거지로 영 찜찜한 기분이 가시질 않지만 그래도 열심히 하는 편이기에 무엇이라 불평도 할 수 없다.

한 두 명도 아니고 70~80명분의 식사를 매 끼니마다 준비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식비는 얼마나 많이 드는지. 먹는 건 끝내주기에 행여 적은 음식을 준비했다가는 먹는데 치열한 싸움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도대체 무슨 음식을 해서 저 많은 형제들을 먹일까?’ 걱정하다가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 바로 통돼지 구이였다. 포모나에 가면 돼지 한 마리를 120달러에 잡아서 통구이를 할 수 있게 해준다. 많은 이들이 먹기에 가격도 좋고 꽤 낭만적인 것 같았다.

선교회 마당 구석에 벽돌을 뺑 둘러 바비큐그릴을 즉석에서 만들어 양옆에 Y자로 나무를 잘라 만들어 세워놓고는 아기돼지를 쇠꼬챙이에 길게 끼워 매달아 놓았다. 앞으로 10시간 이상을 돌려가며 구워야 한다고 하여 예배가 끝나고도 밤새도록 형제들이 마당에서 시간제로 돌아가며 돼지를 돌렸다. 그중 밤 도깨비 마냥 밤잠이 없는 녀석들은 완전히 올나잇으로 제끼며 그렇게 열심히 신이 나서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별을 보며 웃고 찬양하고, PK(김 목사님을 줄여서 아이들이 PK라고 부른다) 몰래 커피도 타서 마시면서 돼지를 구웠다.

어느새 파킹랏 쪽에서 닭들이 새벽이 왔다고 울었다. 밤을 샌 녀석들이 그때서야 피곤을 느꼈는지 슬금슬금 한 두 놈씩 일어나더니 은근슬쩍 어디론가 없어지고 있었지만 돼지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경찰 사이렌이 울어대며 선교회 바로 앞에서 멈추는 것이었고 선교회 옆쪽 담벼락에 번쩍 들어올린 6개의 손들이 보였다. 분명 우리 아이들의 손 같았다. 왜냐하면 한 녀석의 손에 통돼지를 뜯어먹던 집게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 날 이게 무슨 일인가? 프로베이션에 걸려 있는 아이들이 한둘이 아닌데 경찰이 와서 조사를 하고 있다니. 깜짝 놀라 게이트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자 이 근처를 자주 다니는 낯익은 경찰의 얼굴이 보였다. 목사님! 저 아이들 아십니까? 여기 살고 있는 아이들입니까? 묻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그 녀석들에게 무엇이라고 주의를 주고는 경찰들은 돌아갔다.

이 녀석들이 선교회 담 벼랑에 숨어서 몰래 담배를 피우려고 했는데 라이터가 없어 한 녀석이 머리를 쓴다며 돼지를 뜯어먹던 집게로 차콜(조개탄) 하나를 집어 나와 담뱃불을 붙이는 것을 멀리서 경찰들이 보고, 햇빛에 번쩍이는 것이 총이나 칼인 줄 알았던 것이다. 더욱이 우리 선교회에 있는 아이들이 좀 점잖게 생겼어야 말이지. 문신에, 빡빡 깎은 머리에… 누구든지 척하고 보면 ‘아 그렇구나’를 느낄 수가 있었으니.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참으로 장한 일을 치른 녀석들이었다. 목사님, 잘못했어요. 근데 우린 정말 정말로 담배도 안 피웠어요. 험악해진 나의 눈치를 계속 봐가며 사실 담배 못 피웠어요.

십년감수한 사건이었다. 예수님! 생일날, 정말 죄송합니다. 그것도 담배를 피우려다 사건을 일으킨 그 녀석들. 남들이 안다면 선교회를 뭐라 할까? 그러나 나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아이들이었다. 그것을 녀석들이 느꼈을까! 통돼지 구우려다가 내 마음이 통돼지가 되는 줄 알았던 크리스마스였다. 올해 크리스마스에는 제발, 아무 일 없이 예수님 생일을 축하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