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어, 그림속에 사람들이 있네 ”

2003-08-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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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트 오브 더 매스터스’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서 그리스 시대의 대리석 조각들을 눈이 시리도록 감상한 후 젤라또를 사먹으러 들어갔다가 뒤로 넘어질 것처럼 놀랐던 적이 있다. 방금 뮤지엄에서 봤던 포도송이 뚝뚝 떨어질 듯한 머리의 박카스 신 조각, 그 콧날 그대로의 남자가 젤라떼리아에서 어떤 맛의 젤라또를 퍼줄까 묻고 있는 것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산드로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란 그림에서 보았던 것과 꼭 같이 생긴 긴 머리채의 금발 여인이 옷깃을 여미며 길거리를 걷고 있다. 거리에서 만난 이태리 인들의 외모는 하나같이 그림과 조각처럼 아름답고 멋있었다.

매년 여름 라구나 비치를 뜨겁게 달구는 행사 ‘패전트 오브 더 매스터스(Pageant of the Masters)’를 감상하고 난 뒤 다시 한 번 피렌체에서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무대 위에 올려진 그림 속 주인공들은 평일 낮 어느 스타벅스 지점에서 우리에게 카푸치노를 만들어주었던 청년일 수도 있고 레스토랑에서 식사 주문을 받던 웨이트리스일 수도 있는 일. 분명 우리들의 삶을 오브제로 화폭에 옮긴 것이 예술이건만 예술가의 애정으로 포착된 순간은 일상이 아닌 축복된 모멘트로 화한다.
라구나 비치의 여름은 예술과 동의어다. 전세계 아트 팬들을 불러모으는 소더스트 페스티벌이 여름 내내 열리고 어바인 보울에서는 페스티벌 오브 아트와 함께 ‘Pageant of the Masters’라는 독특한 아트 공연이 펼쳐지니 말이다.


누가 처음 이런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을까. 야외 극장 무대에 인류가 사랑하는 아트 작품을 라이프 사이즈로 실제의 모델들이 재현해 낸다는 기막힌 발상을. 제1회 ‘Pageant of the Masters’가 열렸던 1932년에는 보드빌 극장에서 기증한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액자 안에 포즈를 잡고 앉아 있던 것이 고작이었지만 지금은 얘기가 많이 달라졌다.

화가들은 원작과 똑같은 백그라운드를 준비하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들과 의상 담당 자원봉사자들은 옷을 입히고 머리를 매만져 평범한 이웃과 같은 모델들을 그림 속 주인공으로 재탄생시킨다. 여기에 뮤지엄 수준의 조명이 무대 위에 비춰지면 액자 속 모델과 백그라운드 그림은 그 모습 그대로 명작이다. 2-3분씩 정지해 있는 장면과 꼭 어울리는 음악도 라이브로 연주되고 낮은 목소리의 나레이터가 작품의 배경과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니 이보다 더 예술적으로 예술 작품을 즐기는 방법이 또 있을까 싶다. 가끔씩 너무 정적인 공연에 액센트를 주기 위한 댄스와 노래 등 라이브 공연도 더해져 말 그대로 살아있는 예술을 체험하게 된다.

올해 ‘Pageant of the Masters’의 주제는 사계절(Seasons). 보티첼리의 그 유명한 프리마베라(봄) 등 40여 점의 작품들은 마치 무대 위에 올려진 안토니오 비발디의 현악 4중주를 듣는 것 같은 공연이었다.

처음 무대에 오른 미국 화가 John Falter의 작품 세 점으로는 자녀들 학교 보내고 주말에 피크닉 가는 미국인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었다. 1900년대 프랑스와 유럽에서 인기 있었던 아르누보 스타일의 램프를 무대 위에서 재현한 순서는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금빛으로 동상과 같은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용감하게 나신으로 무대에 올랐던 자원봉사자에게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고 싶다.

Seasons라는 주제를 포스터와 카드만큼 잘 표현한 장르는 없을 게다. 팝업 되는 발렌타인 카드와 눈길을 썰매로 달리는 장면이 그려진 크리스마스 카드 그림을 무대 위에 올리면서 야외극장에는 눈도 뿌려지고 스케이트를 신은 무용수들이 계절을 한겨울로 바꾸어 놓는다. 올드랭사인의 선율과 함께 ‘해피 뉴 이어!’ 외치는 소리에 이어 요란하게 폭죽이 터진다. 그래, 저렇게 한 해가 오고 가는 것이지.

2부에는 아주 기대하던 작품이 몇 점 있었다. 인상파 화가 가운데 하나인 귀스따브 카이에보뜨의 ‘비오는 날 파리의 거리’라는 작품. 프록 코트를 멋지게 차려 입은 신사와 귀부인이 우산을 들고 서있는 파리의 거리 장면을 보고 있자니 금방이라도 에디뜨 삐아쁘의 음울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다. 다음 작품은 제임스 티소(James Tissot)의 ‘편지’. ‘비오는 날 파리의 거리’의 여주인공이 그림에서 걸어나와 다음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며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정원에 서서 사랑하는 연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열어보려는 순간의 가슴 떨림과 설렘을 원작만큼 잘 표현해냈다.

가장 기다렸던 작품은 산드로 보티첼리의 ‘프리마베라’. 왼쪽에서 손끝을 모아 춤을 추고 있는 님프들의 모습에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관능미가 넘친다. 메디치 가의 총애를 받았던 보티첼리는 줄리아노 메디치의 정부였던 시모네타 베스푸치를 모델로 이 그림을 완성했다고 전해진다.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가운데 금새 꽃송이라도 벌어질 듯 경쾌한 ‘프리마베라’가 연주되는 순간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들은 르네상스 시기의 피렌체로 낭만적인 시간 여행을 떠난다.


헨델의 ‘할렐루야’를 들을 때 모두 기립하는 전통이 있는 것처럼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Pageant of the Masters’에도 아름다운 전통이 전해져 온다. 마지막 작품은 항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라 그라치아 교회의 벽에서 세월과 함께 색이 바래져 가는 프레스코 화는 어바인 보울의 야외 극장 무대에서 원작보다 더욱 생생한 빛으로 다시 태어나 있었다.

글 사진 박지윤 객원기자


박스 기사
▲Pageant of Masters가 열리는 어바인 보울에서는 이 지역을 대표하는 140여 아티스트들의 작품이 전시되는 Festival of Arts가 함께 펼쳐지고 있다. 작품들은 회화와 사진, 조각, 장신구, 의상 등 다양한 장르. Pageant of Masters의 티켓이 있으면 당일은 물론이고 시즌 내내 Festival of Arts를 관람할 수 있다. 8월 29일까지.
▲아무리 요즘 날씨가 무덥다 하더라도 저녁 시간이면 꽤 쌀쌀해지니 두터운 옷이나 담요를 꼭 준비해 가시길. 평소 잘 이용하지 않더라도 모델들의 화장이나 의상의 디테일을 감상하려면 망원경을 가져가는 것이 좋다.
▲공연 일자와 시간: 8월 29일까지 매일 오후 8시30분. 8월 30일은 Gala Benefit 공연으로 꾸며진다. 공연은 휴식 시간 포함 약 2시간 정도. 공연 장소: Irvine Bowl Park (650 Laguna Canyon Road Laguna Beach, CA 92651) 가는 길: LA에서 101 S. → 5번 S. → 605 S. → 405 S. → 73번 S.(유료도로) → Laguna Canyon Rd.에서 내려 우회전해 바닷가 쪽으로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나온다. 주차: 어바인 볼 인근에 사설 주차장들의 가격은 8-10달러 정도. 약간 떨어진 곳의 시 운영 ACT V 주차장은 3달러. 10분마다 운행되는 트롤리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공연 티켓: 15-300달러. 문의 전화, (949) 494-1145 또는 (800) 487-3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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