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집안에서의 급사

2003-02-13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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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의과대학의 한인 여교수와 근 3개월 동안 콘도를 백방으로 함께 찾아다니다 마침 글렌데일의 한 콘도가 단지 내에서도 가격이 10% 이상이나 싸고 펜트하우스라 전망도 좋아서 오퍼를 내었더니 금방 승낙이 되었다.
그런데 셀러로부터 주택 판매시 공개하는 문서인 T.D.S.(Transfer Disclosure Statement)를 받아보니 집 주인이 2개월 전 심장마비로 이 집 안에서 사망했다고 적혀 있었다.
집을 팔 때 가족 중 에이즈 환자가 살고 있었다는 것을 밝혀야 하는가, 하지 않아도 되는가에 대한 논란은 들은 적이 있으나, 집안에서 살인사건이나 자살도 아닌 심장마비로 병사한 것을 구태여 밝혀야 하는지 자문하면서 이 T.D.S.를 바이어에게 제출하였다.
여교수는 처음에는 그녀의 독실한 신앙심과 해박한 의학지식에 따라 전혀 개의치 않더니 며칠 후 병원 동료들과 상의해 본 결과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결국 딜이 깨져 버렸다. 한국에서는 집 밖에서 죽으면 객사라 하여 가장 나쁜 죽음으로 본다. 심지어 병원에서 임종이 다가오면, 환자를 집 안으로 모시고 와서 돌아가시게 한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집 안에서 죽는 경우가 극히 드문 탓인지, 집 안에서 누가 죽으면 유령이 나올지도 모르는 집(Haunted House)으로 생각하는지 혹은 소송을 밥먹듯 하는 미국인들답게 집 안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팔았다가 바이어가 그 집에서 살다가 우연히 알고서, 밤마다 망령에 시달린다는 핑계로 셀러에게 소송을 제기할까봐 이것을 밝혀야 하는지 그 이유는 잘 모르겠으나 아무튼 집안에서 죽은 지 2년 이내면 밝혀야 한다고 한다.
이렇다 보니 여차하여 자기 집에서 죽는 날에는 그 집 값이 폭락할 뿐더러, 빈집을 팔기도 쉽지 않는 딱한 처지에 유가족이 놓이게 된다. 집 안에서 사람이 죽은 집이라 소문이 나서, 아니 공개하여 알릴 의무가 있으니 그 부동산을 제값 받고 제때에 팔기는 어려워지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위의 부동산과는 정반대의 흥미로운 현상은 망자가 남긴 동산 중에서 가재도구, 집기, 옷 등의 유품의 처리다.
미국인들은 망자의 유품이나 가재도구 등을 친지, 유가족들이 기념품 나누듯 별로 거리낌이 없는데 반해, 한국인들은 태울 수 있는 유품들은 태워 버리거나 망자의 체취가 묻은 가재도구 등을 장례 후 되도록 빨리 처분해 버린다는 점이다.
일종의 미신 섞인 풍습들이라 그 이유를 찾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일 터지만, 첨단과학과 기독교 문명이 지배하는 미국에서조차 집안에서의 급사로 딜이 깨어지면 부동산 중개인인 나마저 ‘하필 집안에서 죽을 게 뭐람’하며 중얼거리며 ‘닭 쫓던 개’마냥 멍하니 그 집을 흘겨보게 된다.
(213)388-8989
듀크 김
<옥스포드 부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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