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역감정과 위화감

2003-02-1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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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말 자동차로 전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좀 무리인데도 언제 또 해보랴 싶어 강행군에 나섰다. 5박6일. 주마간산 식으로 서울-강릉-동해안-부산-안동-남해-목포-지리산-전주-대전-서울의 코스를 잡았다.

소감을 밝히자면 강원도가 제일 못 사는 것 같았고 대구는 대통령을 여러 명 배출했는데도 도시가 발전을 못해 답답해 보였다. 반면 목포는 많이 모습이 바뀌었고 활기에 차 있었다. 잘 살고 못 사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했느냐. 거리의 집 모양과 그 앞에 세워진 자가용으로 눈짐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오면서 놀란 것은 과거 조용했던 어촌들이 자동차 시대를 맞아 완전히 관광타운으로 변한 모습이다. 그 중에서도 강릉아래 있는 ‘정동진’이라는 해변마을(사진)이다. 이름 없던 이 마을은 TV 연속극 ‘모래시계’에 소개된 후 하루아침에 유명해져 지금은 산꼭대기에 배모양의 호텔과 미술관이 있는가 하면 마을 전체가 모텔, 식당, 술집으로 변해 있다. 서울에서 해돋이 보러오는 관광객들로 붐비고 신혼부부의 인기 여행코스로 등장한 모양이다.


삼척에서 조금 더 내려오면 근덕면 초곡리라는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고향이다. ‘황영조 기념관’이 웅장하게 지어져 있고 그 앞에는 황영조 공원을 조성했으며 그가 태어난 어촌이 발아래 내려다보인다. 황영조 때문에 이 마을은 관광타운이 된 셈이다.

이번 자동차 여행에서 나에게 민심 소재 파악을 일깨워 준 마을은 영덕 게로 잘 알려진 경북 후포리 어촌이다. 이 어촌에서 식당주인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경상북도에서 왜 노무현 지지가 22% 나왔는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아주머니는 지난번 대선에서 누구 찍으셨어요?”
“노무현 찍었다 아입니꺼”
“경상도 사람이 민주당 후보 찍었으니 용감한 사람에 속하네요”
“민주당을 지지한 게 아입니더. 노무현을 찍은 거라예. DJ는 보기 싫지만”
“옛날보다 어민들이 잘 살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건 맞심니더. 그러나 잘 사는 사람이 너무 많으이까 내가 초라해 보입니더. 너무 빈부의 차이가 심한 거라예. 세상 좀 바뀌어야 합니더”

이 아주머니를 만난 후 기자는 경상도를 여행하면서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종업원을 만날 때마다 누구 찍었냐고 물었더니 예상외로 노무현 지지가 많았다.

전라도에 들어서니 인심도 달라지고 사람들도 달라져 있었다. 뭐라고 할까. 넉넉하고 여유 있는 표정들이다. 과거 DJ 야당시절 긴장되고 비판적인 분위기가 수그러들었다. 사람이 넉넉해지면 여유가 생긴다는 말이 실감날 정도였다. 옛날의 전라도 분위기가 지금의 경상도 분위기다. 완전히 뒤바뀌었다.

지리산 온천이 요즘 새로 생겼는데 이곳에서 만난 식당주인 남자로부터 자기 아버지가 과거 빨치산에 협조했다고 총살당한 후 가족들이 겪은 눈물겨운 세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세상 정말 달라졌구나”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옛날에는 쉬쉬하던 가족의 비밀을 이제는 떳떳하게 이야기할 정도로 사회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DJ의 집권 동안 무엇이 변했는지 알 수 있었다. 사회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그 분위기 속에서 노무현이 탄생한 것이다.

chullee@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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