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삶의 향기’우러난 ‘한잔의 여유’

2002-11-01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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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인들에게 있어 티타임은 생활의 중요한 부분. 마치 “밥 먹고 합시다.”하는 우리들처럼 그들은 “차 마시고 합시다.”를 외친다. 한 잔에 고작 5루피(약 10센트)밖에 하지 않으니 인도에서의 차는 호사라 부를 것도 없겠다. 차를 마시며 물끄러미 관조하는 세상은 있는 모습 그대로 여여롭다. 가을이 깊어 가는 주말 오후, 남용순씨는 친구인 레지나 황씨와 함께 티 하우스를 찾았다. 가을날 해질 무렵은 들판에 서지 않더라도 이유를 알 수 없는 아련한 그리움이 가슴 한구석을 파고든다. 철없어도 마냥 행복했던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일까, 가슴을 헤집어 놓았던 옛 연인에 대한 그리움일까. 평소 운동도 함께 하고 민화도 같이 그리며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좋은 벗과 ‘티 하우스의 여유’를 맛보던 오후, 시간은 진양조로 마냥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오늘 두 화우가 찾은 찻집은 멜로즈 선상의 엘릭서(Elixir, 8612 Melrose Ave.). 평소 건너편에 있는 서점, 보디 트리에 책을 사러 왔을 때 자주 들르던 곳이다. 삼매에 들어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짓고 있는 붓다의 조각과 차주전자를 들고 있는 관세음보살상은 차를 마시기도 전 마음 밭을 고르게 한다. 달빛에 비친 향기로운 매화를 그려 넣은 다기 세트, 송 대의 전통으로 만든 다기, 일본식 철제 주전자, 대나무 통으로 만든 차 보관함 등 한 잔의 향기로운 차를 만들어내기 위한 우아하고 아름다운 소품들에 둘러 쌓이니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는 것 같다.



엘릭서에는 한 잔의 차와 가장 어울리는 사색과 명상의 책들도 많이 모아놓았다. ‘티벳 사자의 서’는 물론 ‘강아지와 고양이를 위한 선’,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의 예술(The Art of Doing Nothing)’을 썼던 베로니크 비엔느의 최신작들까지 서가를 장식하고 있어 책장 들춰보는 것만으로도 정신 세계가 풍요로워지는 기분.
몸과 영혼을 치유하는 동양의 약초에 사로잡힌 주인은 차는 물론 한약방까지 차려 놓고 주류사회에 동양의 문화를 알리고 있다. 뱅갈 차이 티, 연인들의 로즈 티 등 이름도 멋스러운 40여 종류의 다양한 차는 작은 볼에 조금씩 담겨져 있어 직접 냄새를 맡아가며 고르는 맛이 아주 특별하다. 엘릭서에서 만든 간베이 토닉(Ganbei Tonic)은 과일과 향초에서 추출한 100퍼센트 자연 성분으로 만든 묘약. 마시면 마음에 평화와 몸에 에너지를 가져다준다고 하는데 한 모금 마셨더니 믿거나 말거나, 안개 낀 것처럼 흐려져 있던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다.

체코슬라바키아에서 왔다는 아가씨 랑카(Lanka)에게 젠마이 티를 주문하고 패티오로 발길을 향한다. 곧게 뻗은 대나무로 둘러 싸인 패티오의 Zen Garden은 작고 아담하지만 대자연에 안긴 듯한 평화로움을 느끼게 한다. 저쪽 편 테이블에서는 예닐곱 명의 젊은이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채로 눈을 감고 명상을 하고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 있게 차 한잔을 음미하고 난 두 화우는 대화를 나누지 않고도 만족한 미소를 주고받는다. 두 여인의 미소에서 한 잔의 차처럼 은은한 향기가 흐른다. “행복의 극치는 입안 가득한 차 한잔과 설탕 한 조각에 있다.”고 했던 문호 푸시킨의 말이 한 치도 거짓됨이 없다는 것을 그녀들은 오늘 오후에야 확인했다. 엘릭서는 310-657-9300

글 박지윤 객원기자
사진 이승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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