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는 아흔 살 넘은 나이에도 일한다. 그냥 소일거리가 아니다. 2,000평 남짓한 농장에서 키우는 작물들을 다듬어 상품으로 내는 작업이다. 같이 일하는 사람은 총 다섯 명. 그들 모두 균일한 업무 수행능력을 지닌 건 아니어서, 하루 작업량을 계산하면 아흔세 살 남편이 40%, 아흔두 살 아내가 20%가량을 해낸다. 둘 중 하나가 아프거나 다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어휴! 농장에는 비상이 걸린다. 불상사를 막기 위해 능력치 모자라는 젊은 동료들은 세심하게 부부를 돌본다. 커피와 비타민과 알부민을 챙겨드리고, 50분 일한 뒤 10분 쉬는 루틴을 지키도록 채근하고, 뜨끈한 점심상을 차리고, 뭉친 근육 푸시라고 고급 안마의자도 휴게실에 놓아드렸다.
요즘 이 농장에 문제가 생겼다. 하필 가격이 가장 좋을 때인데, 주력 상품인 미나리가 동나버렸다. 열 개 비닐하우스 안에 심긴 미나리들을 살펴보니 하나같이 손바닥 크기 이파리이거나 초겨울 수확 후 새순만 삐죽 내민 녀석들이다. 한겨울 추위 탓만은 아니다. 돌아보면, 지난여름 무더위 때부터 이미 상황은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생명력 강한 식물인 미나리가 계속되는 폭염 아래 맥을 못 추고 녹아내리다 8월 말부터 겨우겨우 상품성 있는 모양새로 자라났다. 수확이 늦어지다 보니 다음 파종 일정도 자연히 밀릴 수밖에 없었다.
타고난 성과주의자 아내는 안달이 났다. 열흘 넘게 쉬는 날이 이어지자 “내 평생 이렇게 시간을 허송한 적은 없다”며 한숨 쉰다. 저장고에 넣어둔 무를 잘라 말리고, 청태에 양념고추장 입혀 말리고, 고구마를 얇게 저며 말리고, 이불 홑청 빨아 말리고…. ‘흑백요리사’에서 최강록 셰프가 대파도 조리고 무도 조리고 닭도 조리고 버섯도 조리고 병어도 조려댔듯이, 가능한 모든 것을 썰고 말리며 타는 속을 달랜다.
낭만주의자 남편은 휴가를 제대로 즐기는 눈치다. TV 앞에 앉아 밀린 드라마와 영화를 보다가 점심 먹은 후 동네 한 바퀴 걷고 청소기 한 번 돌리면 해가 저문다고 했다. “나야 뭐, 매달 들어오는 국민연금이며 노령연금만으로 충분하니까.” 눈치 없는 말로 아내 복장을 터뜨리기도 한다. 그 연금이란 게 실은 농어촌 의무가입이 시행되기 훨씬 전인 1980년대 아내가 담당 공무원을 찾아가 남편 앞으로 가입한 거였다.
이 휴가도 며칠 후면 끝날 터. 혹한에도 식물은 매일 손톱만큼 자라고, 다음 주면 농장일이 재개된다. ‘노는 게 제일 좋아’라며 휴식기를 즐기던 아흔세 살 남편의 태세전환도 때맞춰 시작됐다. ‘힘닿는 대로 일하며 사는 게 최고’라고, ‘내 삶이야말로 그래서 최선’이라고. 농장 매출액에 따라 여전히 행복이 널뛰기하는 아흔두 살 아내는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나 보다. 모처럼 ‘호호’ 웃는 목소리에 윤기가 흐른다.
매일매일 전해지는 노부부의 자잘한 뉴스를 들으며 나도 웃고 한숨 쉰다. 그들이 내 아버지이고, 내 엄마라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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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