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름 사이사이 점토가 파고든 왼손 새끼손가락을 가져다 대니 달항아리의 주둥이가 나타난다. 도공의 손가락 굴곡이 곧 주둥이 하단 곡선 모양이다. 상단과 내부는 오른손 엄지와 검지로 꼬집어 빚으니 달항아리에는 도공의 일부가 새겨졌다고 할 수 있다. 도자기 바닥의 굽을 스윽 파내니 달항아리가 완성됐다. 공방 ‘로원요’의 권태영 도자명장이 투박한 원통 모양의 점토를 물레에 올린 지 10분 만이다. 누군가 일을 쉽게 하는 것 같다면 그 사람이 진정한 고수라고 했던가. 권 명장의 손 역시 40여 년간 흙과 물에 단련됐다. 불쑥 요장(窯場)을 찾은 행인에게 “들어와서 (도자기 빚는 모습을) 구경하셔도 된다”고 제안할 만큼 실력에 대한 자부심 또한 느껴진다. 크고 작은 공방에 자리 잡은 공예인은 수백 명. 이들의 작품을 보고 함께 물레도 돌릴 수 있는 경기 이천시 도공마을이다.
■ 전통 도자기 맥을 잇는 이천도공들이 본격적으로 이천으로 모인 때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간다. 16세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는 “도기(陶器)와 백옥(白玉)이 이천도호부의 특산품”이라고 명시돼 있다. 관용 도자기를 제작하던 광주 관요에 도공과 백토를 공급했을 정도로 도자 문화가 발달했다. 청자에 비해 불순물 적은 흙이 필요한 백자는 물과 흙이 좋은 이천에 특히 맞춤했다. 지금도 많은 공방이 자리한 신둔면 일대는 소나무 숲이 울창해 가마 땔 장작이 풍부했다. 이천의 또 다른 특산물, 쌀도 도움이 됐다. 백자, 청자, 분청은 각기 다른 유약을 써야 하는데 백자에 가장 맞는 유약은 볏짚이라고 한다.
1960년대 들어 가마가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자 전국 도공들이 전통가마의 명맥을 유지하던 이천으로 모여들었다. 당시 이천 신둔면 수광리에 남아 있던 장작가마 ‘칠기가마’다. 칠기는 옻칠한 목기처럼 짙은 흑색 광택을 띠는 전통 도자기로 흑유(黑釉) 유약을 입혀 특유의 빛깔을 띤다. 외양과 쓰임새는 옹기에 가깝지만 통상 옹기 굽는 온도보다 높은 1,200도 이상에서 굽는 등 백자의 제작 공정을 따른다. 도공들은 이 가마에서 백자와 청자도 구울 수 있었고, 덕분에 끊어질 뻔했던 전통 도자 문화의 맥이 이천에서 지속될 수 있었다.
도공과 공방이 늘자 칠기, 백자, 청자, 분청, 생활자기 등 모든 종류의 도예가 이천에서 꽃을 피웠다. 1965년 한일 수교로 물꼬가 트인 일본인 관광과 1970년대 경제 활황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다. 이천이 본격적으로 ‘도자기 도시’로 알려지기 시작한 시점이다. 권 명장은 “70, 80년대에는 한 요장에 직원을 30명씩도 뒀다”며 회상했다. 홍승주 승주도예 대표는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관공서, 은행에서 수천 개씩 주문을 넣는 일이 흔했다”고 했다.
2000년대 들어 도자기가 예전만큼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이천 도공마을도 쇠퇴의 길을 걷는가 했다. 마을이 다시 살아난 계기는 체험 문화의 확산이었다.
공방에서 도자기를 빚는 과정은 흙을 ‘토련’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고운 점토 내 수분이 고르게 퍼지게 하고 남은 기포를 빼는 과정이다. 예전에는 손과 발로 치댔지만 요즘은 원통형 토련기를 사용한다. 우렁찬 압축기(컴프레서) 소리를 들으며 기계에 점토를 투입하면 반듯한 원통 모양으로 토련돼 나온다. 이때 물을 첨가해 필요한 수분 함량을 맞춘다.
토련된 점토를 물레에 올리고 원하는 모양으로 빚는 단계가 ‘성형’이다. 물레 체험을 한다고 하면 보통 성형을 체험하는 것이다. 흙이 마르지 않게 손에 물을 묻혀가며 모양을 잡는 것이 관건이다. 생각보다 힘이 들어 놀라는 체험객도 적지 않다. 용기 내부는 일정한 힘을 유지해 고르게 파야 한다. 빙글빙글 도는 흙의 흐름에 손을 맡기듯이 빚는다. 잔잔한 물레소리를 들으며 흙을 어루만지면 어느새 세상에 홀로 남은 기분. 손끝으로 전해지는 서늘한 백토의 촉감에 집중하게 된다.
성형이 끝난 도자는 물레에서 떼어내 최소 하루는 말려야 한다. 말린 도자기를 뒤집어 굽을 깎아넣고 또 며칠간 충분히 말린 후 초벌 소성(굽기)을 한다. 유약을 칠하고 2차 소성까지 마쳐야 비로소 도자기 한 점이 완성되기에 당일 체험은 성형 단계까지다. 작은 물잔부터 달항아리 같은 중대형 도자도 직접 만들어볼 수 있다. 선택에 따라 체험 시간은 달라진다.
같은 스승에게 기술을 전수받아도 도공의 손 모양과 흙을 쥐는 습관에 따라 다른 도자기가 나온다. 빚은 이의 손길이 도자기 형태에 영원히 기록되는 것이다. 내 손으로 직접 빚은 도자기를 꾸준히 찾는 이유다. 수십 년의 경력자가 손수 지도해주고 마무리까지 책임지니 더할 나위 없다.
물레 체험장은 이천도자예술마을(예스파크)에 입주한 198개 공방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모든 공방이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진 않지만 각 요장의 개성이 묻어나는 도자기를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다. 로원요 같은 전통 명장 요장과 최신 유행을 선도하는 젊은 요장이 어우러진 도자마을, 오붓한 공방 데이트나 아이와 함께하는 교외 나들이로 제격이다.
사기막골도예촌은 이천도자예술마을과 달리 자연 조성된 시장마을이다. 사기막골이라는 지명은 ‘사기(沙器)를 굽던 막사가 있던 골짜기’란 뜻에서 유래했다. 관요에 그릇을 납품하던 도공들이 땔감과 백토가 있던 골짜기에 터를 잡고 살았다. 이천에 도공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1950, 60년대부터 도자기 시장이 형성됐다. 여느 재래시장처럼 사람이 모이니 자연스레 시장이 커졌다.
2018년에 조성된 도자예술마을이 깔끔한 신도시 같은 외관이라면 사기막골은 정겨운 교외 마을 같다. 도자예술마을에는 작업장과 판매공간이 함께 있는 요장이 대부분이지만, 사기막골 요장들은 대부분 마을 밖에 별도 작업장을 두고 있다. 이 때문에 체험 활동보다는 구경하고 구매하는 것이 주가 되는 공간이다. 현재 51개 요장이 운영되고 있는데 손으로 작업하는 곳과 주문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곳이 두루 있다. 월요일은 쉬는 업장이 많으니 방문을 피하는 편이 낫다.
■ 외국인 이목 끄는 K도자기도자예술마을과 사기막골 모두 최근 외국인 관광객 증가로 재도약을 꿈꾸고 있다. 기존 단골인 미국·일본·대만 관광객에 더해 유럽, 동남아시아에서 이천 도자기를 경험하려 마을을 찾는다는 것이다. 권 명장은 “5년 전쯤부터 유럽, 캐나다에서 온 방문객이 늘어나는 것이 체감됐는데, 요즘에는 (해당 국민 관광이) 부쩍 더 활성화된 것 같다”며 “도자 공예를 전공하는 외국인 학생들도 인턴십이나 도시자매결연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이 온다”고 설명했다. 홍 대표도 변화를 체감하고 있다. 그는 “원래 버스를 대절해서 단체 쇼핑을 하는 대만인이나 자유관광을 온 일본인이 외국인 관광객의 대부분이었는데, 최근 들어 유럽 관광객이 사기막골에 눈에 띄게 늘었다”고 말했다.
한 요장 대표의 자랑처럼 내로라하는 세계 도자기 도시 중에도 이천만큼 공방이 밀집된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홍 대표는 “인근 (평택)미군부대에서 복무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 가족들이 기념품·선물용으로 많이 사가 소문이 좀 난 것 같다”고 했다. 권 명장은 “요즘은 청자를 잘 안 보고 내국인, 외국인 할 것 없이 달항아리를 찾아서 많이 빚는다”며 멋쩍게 웃었다. 달항아리도 자태가 곱지만 본래 청자(투각) 전문인 권 명장 입장에선 서운하기도 할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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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