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평선] 외국어 공부와 장수
2025-11-18 (화) 12:00:00
양홍주 / 한국일보 논설위원
다양한 언어를 말하는 능력자들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조명 받아왔다. 2013년 마이클 에라드가 지은 책 ‘언어의 천재들’엔 수십 개에 이르는 다국어를 말했던 초다언어 구사자들이 소개된다. 이 책이 가장 먼저 주목한 인물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다중언어 구사자(일명 폴리글롯·polyglot)로 꼽히는 이탈리아 볼로냐 출신 메조판티 추기경이다. 믿기 어렵지만 일부 연구는 그가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던 언어가 무려 72개에 달했다고 한다.
■ 가톨릭 저작물 사이트 뉴어드벤트(New Advent)에 따르면 18세기 말 사제가 된 그는 볼로냐 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대학병원으로 몰려오는 유럽 각국 부상병들을 돌보면서 수많은 언어를 배우게 됐다. 그가 유럽어는 물론 심지어 중국어로 고해성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본인이 밝히기로는 “50개 언어를 말할 수 있다”는 겸손한 수준이었다. 찰스 러셀이 쓴 ‘메조판티 추기경 생애’에는 “동시대인 수백 명이 목격해 증거를 남긴 유일한 초다언어 구사자”라는 표현이 나온다.
■ 메조판티 추기경은 75년을 살고 죽었다. 현대라면 장수라 할 수 없다. 다만 유럽 남성 평균수명이 40세에 그쳤던 19세기라면 얘기가 다르다. 언어능력이 뛰어났던 인물이 오래 살고 만년까지 실력을 발휘한 사례는 이뿐만이 아니다. 레프 톨스토이도 15개 언어로 읽고 썼다는데 83세까지 살았다. ‘반지의 제왕’을 써 현대 판타지 문학 창시자라 불리는 J.R.R 톨킨 또한 어머니로부터 배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포함해 수십 개 언어를 구사했고 80세 이상 장수했다.
■ 다중언어 구사와 장수 연관성을 규명한 연구 결과들이 잇따라 공개돼 눈길을 끈다.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는 70세 이상 516명을 장기 추적해 언어 유창성이 높으면 최대 9년까지 더 생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최근 ‘네이처 노화’에도 2개 이상 언어를 사용하면 가속노화를 겪을 확률이 절반으로 떨어진다는 논문이 실렸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로 실외운동이 힘들어진 어르신에게 대신 책상 앞에 앉아 외국어 공부 삼매경에 빠져보라 권해볼 만하다.
<양홍주 / 한국일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