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DC의 부촌인 조지타운의 주택가와 공원에서는 백인 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중남미계 여성 유모가 흔한 풍경이었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이들을 목격하기가 쉽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지시로 미국 도시 곳곳에서 이민 당국의 불법 체류자 단속이 대폭 강화됐기 때문이다.
지난 5월에는 워싱턴DC의 다른 동네인 포레스트힐에서 이민 당국 요원들이 공원에서 유모들을 체포하고 아이들을 두고 간다는 소문에 놀란 부모들이 공원으로 달려가는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건은 소문에 불과했지만, 미국 언론에 따르면 불법 체류자 신분이 많은 유모들이 추방될까 두려워 집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아예 그만두는 경우가 잦아졌다고 한다.
트럼프 행정부 출범 이후 찾기 힘들어진 건 유모만이 아니다.
이민 당국이 외국인 노동자가 많은 직장에서 불시 단속을 벌이면서 식당과 건설 현장 등에서도 일손이 부족해졌다.
미국 정부 허가 없이 불법으로 체류한 이들을 체포, 추방하는 게 무슨 문제냐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 다수는 미국인이 꺼리는 직종에서 오랫동안 저렴한 임금으로 일하며 세금을 내왔기에 이들이 공백은 미국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가 많은 농촌에서 외국인 노동자가 부족해지고, 이에 따른 생산비용 증가로 밥상 물가가 오르면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일 공개된 CBS뉴스 인터뷰에서 강력한 이민 단속으로 강력 범죄자가 아닌 농장 노동자들이 추방되고 있다는 지적에 "나는 그 누구보다 더 농부들이 필요하다"고 항변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농가의 불만이 커지자 이주민 노동자를 위한 임시 체류 허가 등을 거론했지만 아직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진 못하고 있다.
경제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이민 단속을 완화하고 외국인 노동자가 합법적으로 체류할 경로를 확대해야 하지만, 합법적인 외국인 노동자 유입까지 반대하는 이민 강경파의 지지로 당선된 터라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는 것으로 관측된다.
정치적 고려와 경제적 현실이 충돌하는 양상인데 미국 제조업 재건에 필요한 대미 투자 한국 기업의 노동자 300여명을 체포했다 풀어준 것도 트럼프 행정부 경제·이민 정책의 모순이 드러난 사례였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 대통령 본인은 외국인 노동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불법 체류자 다수를 강력 범죄자로 묘사해 강경한 이민 정책을 정당화하면서도 대미 투자 한국 기업 노동자같이 미국 경제에 필요한 외국인은 환영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그는 올해 초 트럼프 진영 내에서 전문직 비자 정책이 논란이 되자 자기도 식당 지배인, 와인 전문가, 고숙련 웨이터 같은 전문 외국 인력을 구하기 위해 전문직 비자를 활용했기 때문에 이 사안에 해박하다고 주장했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이 소유한 마러라고 리조트와 골프클럽, 와이너리 등은 서빙, 사무직, 주방·식당 직원, 농업 인력 등으로 올해 184명의 외국인 임시직을 고용해야 한다며 관련 비자를 신청한 사실이 최근 미국 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고물가가 핵심 이슈로 부각되는 상황에서 경제적 고려를 우선해 이민 정책의 수위를 조절할지 주목된다.
한편 유모들이 사라진 워싱턴DC 시내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치안 활동에 투입한 주방위군 장병들이 일상적인 모습이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무법지대'인 워싱턴DC를 안전하게 만들겠다며 지난 8월 군인들을 동원했지만, 정작 이들 다수는 내셔널몰과 주요 관광지 등 범죄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지역에 투입돼 이 또한 모순이라는 지적을 받았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