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힘든 형편에 도박 빠져 ‘큰돈’ 유혹
▶ 4개월간 ‘로맨스 스캠’ 범죄 가담
▶ 취업하러 가니 호텔서 목에 흉기
▶ 여권·지갑 뺏기고 범죄단지 끌려가
▶ ‘바보처럼 속아’ ‘잘못 선택’ 후회
▶ 감금·폭행 트라우마 시달리기도
지난해 8월 캄보디아 프놈펜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A(30)씨. 그는 사기조직 사무실에서 로맨스 스캠(이성을 가장한 금융사기) 범죄에 가담한 지 4개월 만에 한인구조단에 구조를 요청했다. 구조단에 전달된 A씨 측의 구조 요청서에는 A씨가 범죄사실을 모두 고백한 대목이 담겼다. A씨는 “불법적 일을 해서 처벌이 두렵지만 이곳 생활이 너무 끔찍하다”고 밝혔다.
17일 한국일보는 비정부기구(NGO)인 한인구조단을 통해 지난해와 올해 캄보디아에 감금됐다 구출된 한국인 7명 중 5명의 구조 요청서 내용을 확인했다. 대부분 취업사기를 당했거나 애초 범죄 가담 의도로 캄보디아로 건너갔으며, 사회적으로 고립됐거나 경제적으로 곤궁한 이들이 많았다. 사단법인 한인구조단은 현지 한인회, 대사관과 협력해 도움을 요청한 재외 한국인을 지원하고 있다.
가정 불화 속에서 성장한 A씨는 10대에 아이를 낳고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다가 지난해에는 온라인 도박에 빠졌다. ‘해외에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온라인 게시판 글에 속아 캄보디아로 갔다가 항공료와 숙박비를 갚을 것을 강요당하며 범죄의 굴레에 갇혔다. B(31)씨는 모친의 수술비를 마련하려 한국인이 운영한다는 컴퓨터회사에 취업하려고 캄보디아로 갔다가 위험에 빠졌다. 자신을 호텔로 안내한 사람은 돌연 B씨의 목에 흉기를 댔다. B씨는 여권과 지갑을 빼앗기고 범죄단지로 끌려갔다가 한인구조단과 대사관의 도움으로 사흘 만에 간신히 풀려났다.
박호정 한인구조단 팀장은 “캄보디아에서 지난해부터 한 달에 20~30명이 구조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신청자 절반가량은 중간에 연락이 끊기고, 연락이 닿아도 10명 중 8명꼴로 ‘숨김 없이 구조 요청서를 작성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지 않아 실제 구조된 인원은 지난해 3명, 올해 4명에 그쳤다. 구조 요청서에는 캄보디아 입국 사유와 위험에 빠진 경위 등을 써야 하는데, 자발적으로 범죄에 가담한 사례가 많아 신청자가 많지는 않다.
박 팀장은 “구조 요청자들을 보면 가정 환경이 불우하거나 경제적으로 벼랑 끝에 내몰려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며 안타까워했다. 캄보디아 시아누크빌에서 한국인을 구출해온 오창수 선교사도 “이곳에 온 청년들은 한국에서 취업도 안 되고, 생활도 어려운 사회·경제적 약자가 다수”라고 전했다.
구조된 이들은 트라우마가 심각하다. C(49)씨는 오랫동안 선원 생활을 하다가 ‘월 800만~1,000만 원을 준다’는 해외 취업 모집 글에 속아 캄보디아로 갔지만, 지인과 통화하다 실상을 알고 범죄단지에 끌려가기 직전에 간신히 도망쳤다. 하지만 이후 정신과 약을 복용하고 있다. 가상자산(코인) 투자에 실패해 빚 변제를 위해 돈을 받고 차명 휴대폰(‘대포폰’)을 제공하러 캄보디아로 갔다가 감금된 D(51)씨도 큰 충격을 받았다. 범죄조직의 위협에서 벗어나려 가족 전체가 연락처를 바꾸기도 한다.
구조된 이들은 대체로 “바보처럼 속았다”고 자책하고,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후회했다. B씨는 “이성적 판단을 제대로 못해 취업사기를 당한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고 토로했다. 구조 요청자들은 대부분 한국에서 지낼 곳이 없는 상태다. 이들은 숙식이 제공되는 일을 찾거나, 지인 집에서 신세를 지거나, 기거하던 고시원으로 돌아갈 거라고 했다.
<
김나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