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백지수표’ 강요하는 미국
2025-10-10 (금) 12:00:00
‘불량국가(rogue state)’라는 용어는 원래 북한이나 이란처럼 인권을 억압하고 핵무기 개발로 국제질서를 위협하는 나라를 지칭해 왔다. 그러나 언어학자이자 정치평론가인 노암 촘스키는 2000년 출간된 그의 저서 ‘불량국가’에서 오히려 미국이 국제법과 유엔 헌장을 무시하고, 힘의 논리로 세계 질서를 주도해 온 행태를 비판하며 미국 자체가 불량국가의 모습을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그는 강대국의 위선과 권력 남용이 국제사회의 ‘법의 지배’를 훼손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최근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행보를 보면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미국은 동맹국과의 합의를 일방적으로 번복하거나, 관세와 투자를 압박 수단으로 활용하며 협상의 기본 원칙을 흔들고 있다.
특히 한국을 상대로 한 무리한 투자 요구는 그 대표적 사례다. 미국은 3,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패키지를 요구하며, 투자 시점과 분야, 집행 방식을 모두 미국이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한국이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보증 방식이나 단계적 집행을 제시했지만, 미국은 “직접 현금 투자 외에는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로 맞서고 있다. 이른바 ‘백지수표’ 투자를 강요하며 동맹국을 사실상 ‘조폭식’ 종속 관계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이러한 일방적 요구는 미국이 오랫동안 주도해온 자유무역 질서와 동맹 간 신뢰를 스스로 훼손하는 결과를 낳고 있다.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과 세계무역기구(WTO)를 통해 확장해온 자유주의적 무역 체제를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우선주의’라는 이름으로 뒤집으면서, 전통적 동맹국들조차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특히 트럼프의 한마디로 협상 결과가 뒤집히는 불확실한 구조는 경제·안보 전반에 불신을 키우고 있다.
진정한 동맹은 일방의 굴복 위에 세워질 수 없다. 미국이 불량국가가 아닌 진정한 초강대국으로 남기를 바란다면, 힘이 아니라 신뢰로 동맹을 이끌어야 한다. 그것이 세계가 미국에게 기대하는 품격이자, 자유주의 국제질서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