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을 열었다. 여름 한복이 눈에 띄었다. 아~ 이런 옷이 있었지! 입을 기회가 없었네. 언제이었던가 친정 엄마가 고국 방문 때 사다 준 옷이 옷장 구석에 숨겨져 있었다,
마치 주인을 기다리듯이. 재질이 마로 되어 있어 섬유 사이에 미세한 틈이 있어 공기 순환이 잘 된다. 90도를 넘나드는 요즈음에 시원하고 쾌적함을 주기에 제격이라 생각했다. 화학 섬유와 달리 민감한 피부에도 알레르기 반응 없이 자연적인 감촉을 준다. 그 뿐만 아니라 한국 전통 멋을 담고 있어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낼 뿐 아니라 몸에 걸치니 가벼워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짙은 홍색으로 분위기를 밝게 해주지 않는가.
마침 내일은 시누의 칠순 축하 파티가 계획된 날이다. 잔칫날 입으면 되겠다 싶어 숨겨진 보화를 찾은 듯 기쁜 마음으로 입어 보았다. 이십 년이 지났지만, 허리선이 드러나지 않는 디자인 때문인지 그런대로 어울리는 듯했다. 그런데 거울 앞에 서 있는 나를 보며 남편이 얼굴을 찡그렸다. “왜 안 어울려요?” “당신이 주인공이 아니잖아!” 아차! 그 한마디에 한복은 다시 옷장 구석에 걸려야 했다.
백상예술대상 특별무대를 시청한 적이 있다. 배우들이 영예로운 상을 받으며 소감을 이야기했다. 그중 내 가슴에 콕 박힌 인상적인 말이 생각난다. “카메라 뒤에서나 무대 밖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며 수고한 분들과 영광을 나누고 싶다.”라고 했다. 처음 시작부터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작진 소개 자막에서 스쳐가는 사람, 배우가 무대를 오르도록 계단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다.
감독은 전체 작품의 방향을 설정하고, 배우의 연기 톤, 동선, 감정 흐름을 조율한다. 연출가는 배우가 관객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무대 전체의 조화를 이끄는 지휘자와 같다.
조명과 음향 담당자는 무대 설치, 조명 세팅, 음향 조절 등 공연의 기술적 완성도를 책임진다. 이들의 역할은 배우가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 주지 않는가.
물론 배우가 연기할 이야기나 대사 하나하나가 모두 작가의 손에서 나온다. 좋은 대사가 없으면 배우도 깊이 있는 연기를 펼치기 어렵다. 상을 받은 배우의 배경에는 훌륭한 대본이 있기 때문이다.
동료 배우 또한 함께 호흡하며 장면을 완성해 나가는 협업자다. 연극이나 영화는 혼자 하는 작업이 아니다. 동료가 진심으로 호응해 줄 때 진지한 감정이 나오고 주연 배우가 감정에 몰입할 수 있다.
끝으로 매니저와 소속사 스태프는 배우의 일정 관리, 컨디션 조절, 이미지 관리, 연습 스케줄을 조율하고 배우가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주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조력자들이다.
뒤에서 힘쓴 사람들은 대중의 시선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중요한 존재다. 공연된 작품은 보이지 않는 손의 헌신과 협업이 만들어낸 집합체다. 배우는 그 결과의 얼굴일 뿐, 이면에는 함께 만든 수많은 사람의 노력과 열정이 숨어 있다. 그 힘으로 대중 문화예술의 찬란한 빛을 만든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들, 무대는 그들로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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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숙 시인·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