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눈먼 자들의 도시』를 처음 읽었을 때, 인간의 눈이 전염병처럼 멀어진다는 극단적인 설정을 현실적으로 풀어낸 작가의 상상력에 감탄했다. 그러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고 다시 읽으니, 작품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작가는 인간의 모순된 본성과 현대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 무지를 날카롭게 고발한다.
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1922년 포르투갈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199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세계 문단의 주목을 받았고, 20세기 세계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눈먼 자들의 도시』를 통해 인간성과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을 드러낸다.
이야기는 한 남자가 신호등 앞에 섰을 때, 아무런 이유 없이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으며 시작된다. 어둠이 아닌, 세상이 하얗게 번지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백색 실명’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를 집까지 데려다준 낯선 남자는 처음에는 선의로 행동했지만, 결국 그의 차를 훔친다. 그러나 곧 그 자신도 실명한다.
처음 실명한 남자는 안과 의사를 찾아간다. 시력에는 이상이 없지만, 눈앞의 사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특이한 백내장일까, 심리적 실명일까, 아니면 실인증일까? 의사는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고, 결국 자신도 실명하고 만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는 정부 기관에 알리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 주지 않는다.
이 실명 현상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퍼져나간다. 도시 전체가 순식간에 공포에 휩싸인다. 정부는 원인 규명보다는 통제에 집중하며, 환자들을 강제로 격리한다. 의사의 아내는 시력을 잃지 않았지만, 앞을 볼 수 없다고 거짓말하며 남편과 함께 수용소에 들어간다. 그녀는 초기에 실명한 환자들과 같은 수용소에 입소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용소는 실명한 이들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점차 공포와 분노, 절망을 드러낸다.
군인들은 자신도 감염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과 총격으로 대응한다. 수용소 내부에서는 무장을 한 폭력 집단이 등장하고, 사람들은 선동과 공포에 휘둘리며 인간 본성의 추악함을 드러낸다.
모두가 눈먼 세상에서 홀로 시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축복일 수만은 없었다. 의사의 아내는 사람들이 드러내는 이기심과 횡포를 목격하며, 자신이 눈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끝까지 숨긴다. 조용히 돕던 그녀는 점차 많은 이들이 자신에게 의존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혼란 속에서 그녀는 단순한 조력자를 넘어, 유일한 ‘보는 자’로서 끝까지 도덕적 책임을 다한다.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고통을 나누고 서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과정은, 인간성이 무너진 사회에서도 공존을 향한 희망을 보여준다. 그것은 진정한 휴머니즘의 실현이기도 하다.
수용소 내부의 폭력 사태에 맞서 함께 힘을 모은 뒤, 그들은 어느 날 경비하던 군인들이 자취를 감췄음을 알게 된다. 밖으로 나가 보니, 도시는 이미 폐허가 되어 있었다. 모든 운송 수단은 멈췄고, 거리는 쓰레기로 가득 찬 채 혼돈의 미로처럼 뒤엉켜 있었다. 눈먼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매며 방황한다.
처음부터 함께했던 이들은 의사의 집에 머물며 서로를 배려하고, 고통과 기쁨, 슬픔을 나누며 진정한 인간애를 회복해 간다. 그들은 타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점차 편견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낀다. 그리고 마침내, 실명 상태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이 소설은 인간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안겨준다. 세상이 온통 오물로 가득 차 있음에도, 그 위에 향수가 뿌려져 있다는 설정은, 우리가 현실의 추악함을 가리고 거짓된 아름다움으로 위장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상징한다.
“다른 사람과 사는 게 어려운 게 아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라는 인물의 고백. 그리고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 우리는 볼 수는 있지만 보지는 않는 눈먼 사람들이다”라는 말은 작품의 메시지를 압축한다.
이 말은 우리가 현실을 보면서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안겨준다. 『눈먼 자들의 도시』는 단순히 ‘눈이 멀었다’는 외형적 사건을 넘어, 우리 모두가 ‘보지 않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냉정한 통찰을 담고 있다. 삶을 관통하는 이 소설은,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정말로 ‘보고’ 있는가?
<
한 영 재미수필가협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