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수요에세이] 요람에서 무덤까지

2025-09-17 (수) 07:47:51 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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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가 올라 아우성인데, 참 많이도 올랐는데, 그래서 그런지 어느 매체에서 슈퍼마켓들의 숨겨진 전략을 파헤쳤다. 참 기가 차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흥미로운 몇 가지를 보면 이렇다.

우선 백그라운드 음악. 차분하고 천천히 흐르는 리듬은 매상을 올린다. 이런 걸 연구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신기한데, 구체적인 숫자까지 나온다. 1분에 72비트 이하의 음이 스로우 음악이고, 이걸 켜 두면 매상이 38 퍼센트 올라간다는 것.

요즘엔 셀프 체크가 많이 늘었다.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서지만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단다. 캐시어를 통하지 않으면 충동구매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여자는 32퍼센트, 남자는 17퍼센트가 준다고 한다. 그러니 자주 이용하자.


슈퍼마켓에 들어가면 첫 번째 거쳐가는 동선이 과일과 야채 파트다. 이것도 우연이 아니다. 마켓에서는 사과를 일부터 산처럼 쌓아 풍요로움을 가장하고, 이런 풍요의 색깔과 향기를 맡으며 그 사이를 걸어가다 보면 절로 기분이 좋아지고 긍정적인 무드를 가지게 된다.

그런 다음 비로소 필요한 걸 집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한다. 기분이 좋아지면 더 오래 가게에 머물고, 더 많이 소비한다. (우울할 때 쇼핑을 하면 기분이 나아지는 원리일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조명도 예사가 아니다. 특별한 전등을 사용해 야채들이 더 싱싱해 보이게 하고, 바나나는 더욱 노랗게 보이게 한다.
커다란 쇼핑 카트는 어린이들을 태우고 편하게 장을 보라는 소비자 배려가 아니다. 쇼핑 카트가 클수록 돈을 더 많이 쓴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채우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이용한 것이다.

자, 이제 그 맛있는 빵 냄새. 갓 구운 빵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많은 가게들이 베이커리를 매장의 전면에 배치하고 있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이건 눈의 만족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입구에서부터 크로상의 맛있는 냄새를 맡게 하려는 전략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루 종일 오븐을 돌리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갓 구운 빵의 아로마는 종일 떠돈다. 인공 냄새를 쓰기 때문이다. 때로 주인들은 이런 인공 빵 냄새를 캐시어 근처에 파이프로 공급해 마지막 순간의 구매를 충동한다. 빵 냄새는 소비자가 배가 고프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그래서 구매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속임수고, 어디까지가 정당한 것일까? 자본은 돈이니 ‘돈주의’가 이제 세상 모든 걸 지배한다는 느낌이 든다. 태어날 때 병원과 산후조리사를 고르는 것부터 관과 무덤 자리를 정하는 것까지 모두 빈부가 차이를 만든다. 그야말로 요람에서 무덤까지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복지를 책임져주는 게 아니라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자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한다.

누군가는 열렬히 비싸게 많이 팔고자 하는 상품의 세 계, 그 바다를 무사히 헤엄쳐 나가기가 쉽지 않다. 결국 무엇을 살 건지 무엇을 포기할 건지 개인의 책임으로 남는다. 오늘은 구수한 가짜 냄새에 속지 말고 빵을 포기해야지, 가 우리의 빈약한 결심이다.

<한영국/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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