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저항의 삶을 촉구하는 지구의 외침들

2025-09-02 (화) 08:08:16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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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지구촌 곳곳이 폭염(暴炎)과 폭우(暴雨)로 몸살을 앓았다. 겨울엔 눈이 내려도 폭설이다. 올여름 남부 유럽은 최고 기온이 7일 연속 화씨 104도(섭씨 40도)를 넘기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샌프란시스코 일대의 6-7월 평균 기온은 화씨 59도로 ‘역대급 추운 여름’을 맞이하였다. 극지방의 빙하는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녹아내린다. 지구촌 대형산불 소식도 귀에 잦다.

지구촌 곳곳의 사태가 이렇게 심각함에도 절박하게 기후위기 해결에 관심을 두는 국가 지도자들이나 정치인들을 보기 어렵다. 간혹 그런 정치인들이 나타나도 그를 지지해 주고 표(票)를 주는 시민들이 그리 많지 않으니 그런 정치인은 힘이 미약하다. 안타깝고 답답하다. 아직도 기후정책을 민생(民生)과 분리하여 바라보는 시각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 않다. 기후관련 정책은 민생과 동떨어진 정책이 아니다. 넓게 보면 환경, 기후문제야 말로 지구촌 촌민(村民) 모두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한 민생이다. 기후위기로 아프리카에서는 물부족 식량부족으로 식의주(食衣住) 곧 민생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 폭염 폭우 폭설 대형산불로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 손해를 보고, 다치고, 죽어간다. 기상이변에 따른 농산물 가격 상승은 곧바로 우리의 식탁 물가를 위협한다. 환경, 기후가 곧바로 우리의 삶이다. 지속가능한 지구를 위한 기후정책이 곧 개인의 민생이고, 국가간의 평화이며, 인류의 미래이다.


1992년 미 대통령선거에서,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빌 클린턴 대통령의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 선거구호가 떠오른다. 이제는 환경, 기후정책을 주목해야 한다. 낡은 패러다임의 정치인들과 국가 지도자들에게 외쳐야 한다.‘문제는 기후위기야, 바보야’(It's the climate crisis, stupid) 지구촌 개개인의 민생도, 언제 나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기후재난으로부터의 안전도, 국가간의 평화도, 인류의 문명도, 후손의 미래도 기후위기 해결에 달려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걱정하고 탄식만 할 때가 아니다. 정치인들만 탓할 일이 아니다. 이미 늦었다고 포기할 때가 아니다. ‘나 하나 변한다고 뭐가 되겠어?’지레 마음 접을 일이 아니다. 반성적으로 사유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고 실천할 때다. 그 시작은 저항(抵抗)이다. 비판적 저항, 생태적 저항, 창조적 저항이다. 내가 나에 대한 저항을 할 때이다.

저서 『분노하라』(Time for Outrage)로 널리 알려진, 일생 사회운동가요 사상가요 외교관으로 저항적 삶을 산 스테판 에셀(Stephane Hessel)은 또 다른 책 『멈추지 말고 진보하라』에서 창조적 저항의 삶을 외친다.“저항하라, 그것이 창조다. 창조하라, 그것이 곧 저항이다.”

인류와 자연의 모든 생명이, 예수께서 말씀하신‘생명의 풍성함’을(요한 10:10) 누리며, 두루 조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위하여 비판적 저항의 삶이 요청된다.
현 지구의 환경오염과 기후재앙은 지금까지 살아온 인류의 삶의 방식이 틀렸거나 낡았음을 말해준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인 이산화탄소는 사실 죄가 없다. 지구자원을 남용하고 오염시키고 과도하게 온실가스를 발생시킨 우리(인류)에게 문제가 있다.

최근 지구의 기상이변은 지구가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요청하는 애타는 외침이다. 인간중심의 낡은 세계관, 이념 혈연 국가 중심의 낡은 체제, 이기적 삶의 방식을 버리고 결별해야 한다. 버림과 결별은 비판적 저항에서 나온다. 비판적 저항은 억압, 독재, 차별같은 어떤 불의한 힘이나 잘못된 사회 현상에 굽히지 않고 버티며 어떤 지향점을 추구하는 힘이다.

인간과 자연의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모든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려는 생명 사랑에서 나오는 의식이 생태적 저항이다. 생태적 저항은 인류 곧 우리의 낡은 세계관과 인간의 욕망에 기반하는 세계체제와 낱사람의 이기적 삶의 방식에 대한 저항이다. 생태적 저항은 또한 낡은 삶의 체계를 고민하고 절규하고 분노하다가 이내 순응하는 자기 자신의 낡은 삶의 방식 곧 낡고 굳어진 자기 자신에 대한 저항이다.

저항적 삶, 생태적 저항의 삶을 살때이다. 내가 나에게, 곧 내가 나의 무감(無感)해진 생명의식에, 나의 낡은 삶의 방식에 저항할 때이다. 생태적 저항은 살아있음의 표현이며, 창조적 삶의 ‘살음’이다.

<최상석 성공회 워싱턴한인교회 주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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