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춘추] 지금은 우리의 산야를 다시 그릴 시간

2025-07-25 (금) 12:00:00 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ㆍ시인
크게 작게
옛 기사를 뒤적이다가 일본 작가가 그린 20세기 초 황해도 개성의 거리 풍경을 보게 되었다. 가와세 하스이의 그림이었다.

그가 그린 개성의 한 장면에는 돌담과 기와지붕을 얹은 고풍스러운 건물이 어스름한 하늘 아래 어둑하게 서 있고, 물가를 따라 몇몇 인물이 조용히 걸어간다. 멀리 산맥이 연한 주홍빛으로 물들며 배경을 이루고, 고요한 강물엔 하늘빛이 비쳐 흐른다. 이 그림 속 조선은 차분하고 정적인 공간이다.

하스이에게 조선은, 중일전쟁이 장기화되고 태평양전쟁의 전운이 짙어 가던 시기에, 잠시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고요한 피난처처럼 비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는 조선인의 목소리나 내면은 드러나지 않는다. 삶의 고단함은 배제된 채, 조용하고 정갈한 아름다움만이 화면을 채운다.


가와세 하스이는 ‘신판화’의 대표자로, 1939년과 1940년 두 차례 조선을 여행하며 조선팔경과 속 조선풍경 시리즈를 남겼다. 이는 일본 총독부의 후원 아래 이뤄진 것으로, 단순한 예술 여행이 아니라 제국주의 문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스이는 에도 시대(17-19세기)에 크게 유행했던 우키요에(浮世)의 전통을 현대에 되살리고자 한 ‘신판화 운동’의 중심 인물로, 잊혀 가던 일본 목판화의 미학을 지키려는 예술적 사명을 품고 있었다.

한국 회화의 전통을 말할 때, 우리 역시 목판화 전통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시대의 팔만대장경에서 시작해, 조선의 문자도와 민화판화, 불화 삽화 등은 실용성과 예술성을 함께 지닌 시각문화로서 널리 퍼졌다. 문자도에는 유교적 가치가, 민화 판화에는 서민의 소망과 해학이 깃들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 의식과 현실 비판의 수단으로 목판화가 활용되기도 했다. 특히 1970~80년대, 오윤과 홍성담 같은 작가들이 거칠고 강렬한 선을 통해 민중의 삶과 분노를 드러냈다. 그들의 목판화는 단지 미술이 아니라, 시대의 기록이자 저항의 언어였다.

가와세 하스이의 목판화가 정제된 아름다움과 고요한 정경 속에서 전통을 계승하려는 예술적 의지를 보여주었다면, 한국의 목판화는 시대의 고통과 현실을 직시하며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일본의 ‘신판화’가 사라져가던 미학의 복원과 개인 감성의 표현에 주력했다면, 한국의 목판화는 일제 강점기와 민주화 운동을 거치며 집단의 기억과 저항의 수단으로 기능했다. 두 전통은 모두 목판이라는 매체를 사용했지만, 그 안에 담긴 태도와 서사는 서로 달랐다. 결국 두 전통의 차이는 예술을 바라보는 방향, 즉 관조인가, 증언인가에 있었다.

한국 목판화에는 애국의 감정이 뜨겁게 담겨 있어, 거칠고 숨가쁘다. 반면, 전쟁의 먹구름 속에서도 미학을 추구한 일본 작가들의 고요함은 오히려 가슴 깊은 곳에서 울분 같은 울림을 일으킨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 김홍도의 풍속화, 그리고 장승업의 격렬한 붓끝이 전하던 한국의 산천은 이미 오래전부터 깊은 감성과 통찰을 담아왔다. 이제 우리의 아름다운 산야와 마을이, 다음 세대 젊은이들의 시선으로 이어져 재창조되기를 바란다. 일본의 우키요에를 넘어설 만큼 세계 미술 속에 뚜렷한 우리의 목소리로 자리 잡기를, 그래서 찬란했던 선조들의 창작예술이 새롭게 꽃피우기를 광복 80주년을 맞아 빌어본다.

<김미선 서북미문인협회 회장ㆍ시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