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곽노은의 독일 인문학 기행

2025-07-24 (목) 08:09:48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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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츠 -활자와 빛이 머문 도시

곽노은의 독일 인문학 기행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마인츠 대성당’.

한 권의 책이 세상을 바꾼 곳
마인츠에서는 작은 아파트먼트에 머물며 6일 동안 도시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라인강을 따라 바하라흐의 고요한 언덕과 포도밭, 리슬링 향이 머무는 뤼데스하임, 르네상스 궁전이 남아 있는 아샤펜부르크, 호박축제가 열리는 루트비히스부르크,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의 숨결이 흐르는 하이델베르크, 동화 같은 골목이 이어진 로텐부르크 오프 데어 타우버, 그리고 현대와 전통이 공존하는 프랑크푸르트까지 발길을 옮겼다. 어느 곳 하나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걷고 머물렀다.

구텐베르크 박물관
마인츠는 인류 최초의 금속활자를 만든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고향이다. 그의 이름을 딴 박물관에는 15세기 활판으로 찍은 구텐베르크 성경이 전시돼 있다. 성경을 보는 순간, 마치 시간이 열리는 듯했다. 글자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어둠 속을 밝히는 작은 등불이었다. 한 권의 책이 신의 말씀을, 사람의 생각을, 그리고 자유를 전했다. 그래서 이곳은 단순한 박물관이 아니라, 문명이 깨어나는 첫 장면이다. 현재 박물관은 2030년까지 임시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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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성 슈테판 교회’.



마인츠 대성당
도시의 중심에는 붉은 사암으로 지어진 마인츠 대성당이 있다. 천 년 동안 그 자리에 묵묵히 서 있는 이 성당은 처음에는 웅장하지만, 오래 바라보면 조용해진다. 역사는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 다만 묵묵히, 조용히 버틸 뿐이다.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한, 말보다 존재로 전하는 가르침이다.

성 슈테판 교회
언덕 위 성 슈테판 교회에 들어서는 순간, 온 공간이 푸른 빛으로 물든다. 프랑스 유대계 화가 마르크 샤갈이 91세에 시작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완성한 스테인드글라스. 나치 시대 망명했던 그가 독일 가톨릭 교회에 이 빛을 남긴 이유는 단 하나, “용서와 화해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담과 이브, 야곱의 꿈, 다윗과 천사들이 파란 빛 속에서 조용히 이야기한다. 생각보다 훨씬 아름답고, 상상보다 훨씬 따뜻한 빛이었다.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위로, 조용하지만 깊은 평화가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샤갈은 끝까지 사랑으로 세상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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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다윗과 천사를 그린 장면, 샤갈의 스테인드글라스 (성 슈테판 교회). 아이스그럽 브라우 양조장의 대표 메뉴인 슈바인 학센과 버섯수프, 감자튀김. 2030년까지 임시 이전된‘구텐베르크 박물관 Moved’.



둔켈 맥주 한 잔 속의 마인츠
저녁이면 마인츠 외곽의 작은 양조장‘아이스그룹 브라우(Eisgrub-Brau)’에서 둔켈 맥주와 슈바인 학센이 기다린다. 커다란 맥주통 옆에서 사람들은 웃고 떠들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학센 한 접시, 진한 버섯수프, 바삭한 감자튀김이 여행의 피로를 풀어준다. 값도 부담 없고, 분위기도 따뜻하다. 여행 마지막 날, 우리는 다시 이곳을 찾았다. 좋은 곳은 한 번으로 부족하다.

마인츠를 걷는 이유
마인츠에 머문 이유는 단순히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가까워서만이 아니었다. 공항까지 기차로 20분, 숙소 비용도 더 합리적이었다. 그러나 그런 실용성을 넘어, 마인츠에는 돌아올 이유가 충분하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샤갈의 푸른 창, 둔켈 맥주의 부드러운 거품과 학센. 이 셋만으로도 이 도시는 다시 걷고 싶은 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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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한 손에 성서를 든 구텐베르크는 지식의 씨앗을 쥔 인류의 손이었다. 40세의 구텐베르크를 상상해 그린 초상화, 문명이 기다린 얼굴(구텐베르크 박물관). 1454-1455년경, 구텐베르크가 직접 금속활자로 인쇄한 성서 진본(구텐베르크 박물관).



<곽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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