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지평선] 가상 아이돌과 AI 가수

2025-07-24 (목) 12:00:00 고경석 / 한국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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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은 방탄소년단(BTS)이 아니다. 넷플릭스다.”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지난 20일(현지시간)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 속 가상의 아이돌 그룹의 인기를 두고 이런 기사를 냈다. WSJ가 주목한 것은 ‘K’가 아니라 ‘가상(Fictional)’이다. 한때 보이그룹 유키스 멤버로 활동하던 케빈 우는 영화 속 보이그룹 사자보이스의 보컬을 맡고 난 뒤 스포티파이 월 청취자 수가 1만 명에서 2,000만 명으로 늘었지만 그는 가상 세계 속의 스타다.

■ 미국에서 가상 밴드가 인기를 끈 건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처음은 아니다. 1969년 ‘슈거 슈거’를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올린 그룹 아치스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등장하는 가상의 밴드였다. 가상 아이돌 가수 시장의 선두 국가인 일본이 낳은 글로벌 스타 하쓰네 미쿠는 벌써 19년째 활동 중이다. 국내에도 플레이브 등 가상 아이돌 그룹의 인기가 높다. 평균 연령 78세인 그룹 아바는 인공지능(AI)으로 구현한 젊은 시절 모습의 아바타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 유럽에선 지난달 5일 데뷔한 신인 록 밴드 벨벳 선다운의 데뷔곡(Dust on the Wind)이 차트 상위에 오르며 인기를 끌었다. AI로 만든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는데 실제로 한 달 만에 AI 밴드라는 사실이 공개됐다. 벨벳 선다운 측은 “모든 캐릭터와 음악, 목소리, 가사는 창작 도구서로 AI의 도움을 받아 만든 오리지널 창작물”이라며 밴드가 “인간도 기계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존재”라고 밝혔다. “AI 시대에 음악 자체의 저작권·정체성의 경계에 도전하기 위해 고안된 예술적 도발”이라고도 했다.

■ 문화·예술 창작 분야에서 현실과 가상, 인간과 AI의 구분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다. 소설가 장강명은 신작 르포 ‘먼저 온 미래’에서 “내 생각에는 인공지능이 아직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따로 있다”고 했지만 인간의 모든 것을 학습한 AI가 모든 측면에서 인간을 따라잡을 것이란 상상도 가능하다. 가상 세계와 AI 기술이 만난 예술은 어떻게 바뀔까. 실험은 벌써 시작됐다.

<고경석 / 한국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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