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스승들’이란 시를 읽었다.
‘열네 살의 임방울/ 아버지 손에 이끌려/ 찾아간 곳/ 춘향가의 박재현/ 거기서 춘향가 홍보가 익힌 뒤/ 거기 더/ 유성준 찾아가/ 수궁가 적벽가를 익혔다/ 목구멍 찢어지는 갈성(渴聲)을 크게 터득/ 송만갑의 추천으로/ 그의 서편제 무대가 베풀어졌다/노래야 서편제이지 서편제이구말구/
그 시절 일제시절/ 쑥대머리 유성기판 1백만장 썰물로 팔려나갔다/ 그러나 그를 가르친 스승들/ 제자 임방울의 이름이 하도나 커버려/ 어디서 사는 지 죽었는 지/모르게 묻혀버려/ 스승이란 석가나 공자가 아닐 것/ 스승이란 제자의 뒤에서 봄눈처럼 녹아 사라지는 것/ 이러코롬 ’ (고은시집 ‘만인보14’)
명창 임방울(1904~1961)의 춘향가 쑥대머리는 탁하고 거칠다가도 완전히 삭아버려 구구절절 가슴이 녹아내리는 듯 애절한 창법으로 소리를 한다.
전남 광주시 출생으로 본명은 임승군이었으나 어려서 방울 방울 잘 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 예명 ‘임방울’이 되었다 한다. 일제 말기와 한국 전쟁으로 어지럽던 민족 수난의 시기에 전통 판소리로 한민족의 한을 달래준 국창 임방울, 그의 명성이 얼마나 크기에 스승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버렸는가.
또 얼마 전에는 올해 개봉된 영화 ‘승부’를 보았다. 바둑 황제란 칭호를 지닌 조훈현과 바둑계의 신이라 불리는 이창호, 사제(師弟)의 이야기인데 스승 조훈현 역에 이병헌, 제자 이창호 역에 유아인이 나온다.
스승의 집에서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는 제자를 ‘내제자(內弟子)’라고 한다. 1990년대 프로바둑계의 1인자로 우뚝 선 이창호 9단이 조훈현의 내제자인 것이다. 1984년부터 9살이던 이창호는 당시 31살이던 스승의 집에서 먹고 자며 바둑을 배웠다. 스승은 제자의 풀어진 운동화 끈을 묶어주고 사모는 어린 그의 머리를 감겨주며 수양아들처럼 자랐다.
스승과 함께 한 5년 후인 1990년 2월3일, 제29기 최고위전에서 열다섯살의 제자가 반집 차이로 스승을 이긴다. 10년동안 천하무적이던 조훈현이었는데 이후 이어진 대국마다 이창호가 우승하면서 1995년 조훈현은 타이틀을 다 잃은 무관이 되어버린다.
영화 속에서 대국이 끝나고 스승과 제자는 조훈현의 아내가 모는 차를 함께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패배한 스승은 말이 없고 승리한 제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조훈현은 황당했고 화가 났지만 제자를 몰아붙이거나 시기질투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냈고 다시 제자와의 대국에 나섰다. 이후 두 사람은 한국 바둑의 황금기를 동반자이자 경쟁자로 빛내었다. 때로 스승이 승리(춘란배)하면 언론은 ‘돌아온 황제 조훈현’이라고 주먹만한 활자 크기로 신문기사 제목을 뽑았다.
조훈현은 ‘제자한테 빼앗기는 게 낫다. 내 시대가 백년 천년 갈 것도 아니고 그 시기가 생각보다 일찍 온 것이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창호가 나에게 배웠다는 것 자체가 내게 영광이고, 나도 바둑계에 기여 한 것같아 기쁘다”고 했다.
도제(徒弟)교육이란 것이 있다. 도제는 장인(匠人)이 되기 위해 장인으로부터 훈련을 받고 있는 사람을 이른다. 보통 스승의 집에 머물거나 가까이 지내며 일상의 대부분을 함께 지내게 된다. 개인의 경험과 노하우가 중요한 기술과 실무의 영역에서 지속되었다. 중세유럽 길드의 도제는 유명하며 도공이나 목수같은 전문직종 대부분은 도제식 교육을 통해 기술이 전수되어왔다.
하지만 스승의 인성이 좋지 못하면 제자를 가혹하게 부려먹거나 기술은 안가르쳐주고 쓸데없이 시간만 끄는 등 갑질을 하기도 한다. 특히 제자의 실력이 자신보다 뛰어날 경우 어떻게든 눌러버리려 하거나 자신의 이름이 제자의 명성에 묻힐까 봐 아예 후진 양성을 포기하는 스승도 있다.
그래도, 자신보다 낫다 싶으면 제자에게 배우려 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는 바람직한 사제도 있다. 조훈현은 임방울의 스승들처럼 은퇴하지도, 스스로를 포기하지도 않았다.
집을 떠나 독립하는 제자에게 “네가 항상 자랑스러웠다.“ 고 말해주는 스승, 하산한 이후에도 스승을 부모처럼 떠받드는 제자, 우리는 이들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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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뉴욕지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