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화산책] 멈추지 않고 살아 있어야 전통이다

2025-05-22 (목) 05:40:45 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 / YASMA7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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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 음악과 국악이 한 무대에 선다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뻔한 무대를 떠올릴 것이다. 이질적인 두 음악의 ‘만남’이라는 표현은 어쩌면 서로 다른 존재가 잠시 마주치는 정도로 끝날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LA를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젊은 체임버 오케스트라 ‘델리리움 무지쿰(Delirium Musicum)’이 한인 국악 연주자들과 함께 지난 5월3일과 4일 샌타모니카와 LA에서 진행한 음악회는, 고정화된 형식을 따르지 않는 젊은 체임버 그룹 답게 그런 선입견을 부드럽게 허물었다.

‘델리리움 무지쿰’ 자체가 고정 관념을 깬 앙상블이다. 연주자들은 정장 대신 개성 있는 편안한 복장에 긴 스카프를 두르고, 첼리스트를 제외하고 모두 서서 연주하며, 곡에 따라 자리를 바꾸어 주연과 조연을 정하는 인상을 준다. 리더인 바이올리니스트 에띠엔 가라는 때때로 짧은 해설을 곁들여 관객과 소통한다. 무대는 실험적이지만 결코 산만하지 않다.


연주자들은 젊지만 음악은 높은 수준으로 정통을 지키면서도 누구나 어렵지 않게 다가갈 수 있도록 허물 없는 분위기를 만든다. 클래식을 정형화된 장르가 아닌, 살아 있는 언어처럼 다루는 이들의 방식은 열린 구조와 다문화적 감수성을 품고 있는 LA와 닮아 있다.

그들이 기획한 프로젝트 ‘LA의 목소리(Voices of LA)’는 다양한 커뮤니티의 전통 음악을 클래식 언어로 풀어내려는 시도이며, 그 첫 번째 주제로 한국 전통 음악이 선택됐다. 무대에는 대금, 피리, 가야금, 장구 등 전통 악기를 연주하는 국악 연주자들이 종묘제례악을 연상시키 듯이 등장을 리드했고, 델리리움과 키보드 연주자가 함께 호흡을 맞췄다.

표면적으로는 국악 연주자들이 특별 게스트처럼 연출되었지만, 연주의 내용은 결코 부차적이지 않았다. ‘누가 더’라는 비교가 아닌, 진정한 협주였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소리의 조화였다. 음계와 음색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국악기와 서양 악기 사이에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각 악기의 정체성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어떻게 조율되고 연출되느냐에 따라 ‘장르의 경계’는 얼마든지 유연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무대였다.

사실 서양 음악도 유럽 여러 나라의 민속 악기들이 모여 타협하며 형성된 것이니, 거기에 한국의 국악기든 다른 민속 악기든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어색할 이유는 없다.

이번 공연에 참여한 국악 연주자들 역시 그 가능성을 증명하듯, 각자 동시대적 감각을 지닌 채 무대에 섰다. 뉴욕, LA, 보스턴 등지에서 활발히 활동 중인 이들은 의상에서도 고전적인 요소를 유지하면서도 젊고 유니크하며 세련된 이미지를 드러냈다.

작은 체구로 길이 약 80cm에 이르는 대금을 자유자재로 다룬 송지연, 깊이와 경쾌함을 들려준 피리 연주자 가민, 국악과 재즈를 넘나드는 타악 연주자 김지혜의 신명나게 치던 장구의 장단, 피아노와 첼로를 거쳐 작곡과 가야금으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펼쳐가고 있는 김도연 등 이들의 존재는 그 자체로 ‘지금의 전통’을 상징했다.


이번 무대는 단순한 협연이 아니라 ‘전통을 어떻게 현재화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동시에 그에 대한 가능성 있는 답을 제시한 시간이었다. 전통 악기는 여전히 많은 무대에서 특별한 자리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작곡가들이 그것을 특정 문화의 상징이 아닌 표현의 도구로 받아들이는 순간, 음악은 더 이상 과거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 전통악기의 음색은 깊고도 유연하다. 그것이 반드시 국악이라는 틀 안에만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국악의 세계화나 현대화를 단순한 서양화로 오해하거나, 문화 교류의 장식으로 소비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방향은, 전통 악기가 음악 안에서 자연스럽게 기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K팝에도 국악이 스며들고 국악 무대에도 서양 악기가 자연스럽게 함께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질 것이며, 각자의 고유성을 지키면서도 새롭게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전통은 멈추면 안 된다. 멈추지 않고 살아 있어야, 전통은 이어진다.

<손영아 문화 칼럼니스트 / YASMA7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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