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금요단상] 오렌지 향이 피어나던 날

2025-04-25 (금) 12:00:00 이희숙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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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 첫돌이다. 처음이란 일의 과정에서 시간이나 순서상 맨 앞에 놓이는 부분을 말한다. 아가는 태어나면서 부모와 처음 만난다. 나와 아기 아빠와 첫 만남은 아빠 나이가 다섯 살 때였다. 그 소년의 킨더가든 입학부터 성장 과정을 지켜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엿한 직장인으로서 가정을 꾸려 딸을 선물로 받았고, 그 딸이 오늘 돌을 맞이하다니 감격스럽다.

첫돌은 아가가 태어난 지 365일, 작은 숨결로 부모 곁에 와 준 지 1년이 되는 날이다. 아빠는 아기를 처음 안아보며 떨렸고, 아기가 옹알이하고, 혼자 두 발로 서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던 순간들이 모두 기적 같고 감사한 하루하루였다고 말한다. 아이가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자라도록 기원하는 소중한 날이기도 하다. 탁자 위에 놓인 돌잡이 물건들. 실, 돈, 연필, 청진기, 마이크… 아이의 작은 손이 무엇을 향해 갈지 모두가 숨을 죽이며 지켜본다. 미래를 예견하는 놀이인 동시에, 아이가 앞으로 이 세상에서 펼쳐 나갈 기대와 축복하는 시간이 된다.

우리 집 뜰에서 어른들과 친구들을 초대해 축하연을 베풀었다. 작고 소중한 존재가 주는 큰 기쁨을 나누며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은 자리를 마련했다. 뜰에 있는 오렌지 나뭇가지에 눈꽃이 내려앉았다. 올해엔 길어진 추위 탓에 꽃이 늦게 피어 열매와 함께 매달렸다. 바람이 스치니 온 집안에 은은한 꽃 향내가 가득 차고. 햇살이 아가 미소로 피어났다. 나무 아래 하얀 꽃잎 곁으로 물씬 익은 오렌지 열매가 떨어져 뒹굴었다. 다람쥐와 새들이 달콤한 맛에 취해 발걸음이 바빠졌다. 초록 잔디 군데군데 오렌지 조각들이 흩날렸다.


아침 일찍 참석한 아빠 친구들이 연회장 테이블과 의자를 나르고 천막을 쳐 그늘을 만들었다. 그들은 아빠와 함께 프리스쿨부터 대학을 같이 다닌 동시에 우리 학교 졸업생이기도 하다. 프리스쿨과 방과 후 교실을 수료하고, 20년이 훌쩍 넘은 오늘 그들을 만났지만, 어릴 적 모습이 되살아나 추억 조각들이 맞춰졌다. 오렌지를 한입 베어 문 상큼한 맛을 전해주었다. 말간 그리움이 되어 마음 깊은 곳을 맴돌며 오렌지 향기 속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꽃과 열매가 공존하는 오렌지 나무 아래 돌상이 차려졌다. 할머니와 고모는 풍선, 떡, 꽃으로 테이블을 장식했다. 그동안 찍어 전시한 사진이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보여 주었다. 초롱초롱한 눈빛이 피어나는 시간이 향기로 물드는 것 같았다. 오렌지를 주제로 장식했다. 주황색 풍선이 감사와 기쁨을 빵빵하게 고조시켰다. 한 살, One의 ‘O’는 오렌지였다.

햇살이 껍질을 벗더니 화기애애한 공기 속을 가르며 벌들이 날아든다, 순전한 사랑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 절절히 사모하는 마음은 작은 망울로 맺혀 시간을 먹고 자랄 것이다. 하나님 은혜와 부모의 사랑이 넉넉한 햇볕이 되어 쏟아졌다. 성숙한 오렌지 빛으로 풍성한 삶을 영글게 할 것이다.

오렌지 향기는 나를 일으켜 세우고, 무거운 기분을 가볍게 할 뿐 아니라, 바쁘고 지친 일상에서 작은 위안을 준다. 또한 햇살이 가득한 정원은 내일을 향해 항해하는 바닷바람처럼 생기롭다. 향긋한 오렌지와 꽃. 그 속에 담긴 따뜻한 기억. 그리고 잊고 있던 나의 웃음! 그 향내가 퍼지는 순간, 삶은 더 환하고 부드러워진다.

기나긴 시간을 지나며 나는 얼마나 성숙한 열매가 되어 가는지? 내 삶이 풍기는 내음이 과연 향기로울까? 오렌지 향은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이희숙 시인ㆍ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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