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인 칼럼> “이미… 그러나 아직…”
2025-04-09 (수) 09:55:24
최근 아주 가까이 지내는 한 선교사와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서 뜻하지 않게 상담자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 선교사는 오랜동안 한 나라에서 헌신적으로 선교사 활동을 해왔는데 지난 몇 년간 육신적 그리고 정신적 피로가 누적이 되면서 더 이상 선교사 생활을 하기가 어렵다고 호소를 해온것이다. 이제는 우울증까지 찾아온 것 같다고 하면서 이대로는 더 이상 사역을 하는 것이 힘들 것 같다고 하길래 무엇이 근본적인 문제인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자신이 그토록 오랜동안 섬기는 사람들이 전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서 극심한 좌절감이 왔다는 것이다. 자신이 스스로 느끼는 처절한 무능함 앞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것으로 보여진다. 나에게 있어 그러한 선교사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 처럼 들리지 않았다…
목회자로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섬기는 대상들이 전혀 변화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이나 좌절을 경험하는 것은 아마도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공감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친구 목사들과 만나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가 바로 이 부분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망과 좌절보다 목사로서 변화되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면 갖게 되는 자괴감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러한 자괴감에서 오는 질책과 죄책감으로 인한 상한 마음으로 깊은 번민 가운데 있을때에 하나님께서 희망적인 메세지를 주셨는데 바로 신앙의 선조들을 모습을 통해서 주시는 깨달음이었다. 한 마디로, “이미… 그러나 아직…”으로서 성경에 나오는 야곱을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같다.
‘야곱’ 이란 이름은 ‘발뒤꿈치를 잡다’는 뜻에서 유래하여, ‘선수 치는 자, 속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야곱이라는 이름은 실제로 그가 태어나던 상황에서 손으로 쌍둥이 형인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음을 묘사할 뿐만 아니라, 교활하고 속임수 많은 야곱의 성격을 암시하고 있다. 실제로 야곱은 이름 뜻대로 ‘속이는 자’로서 형 에서를 속이고 장자권을 빼앗아 왔으며, 또한 아버지 이삭도 속이고 장자권의 축복을 가로챘다. 이것을 알게 된 형 에서가 분노해서 야곱을 죽이려 했을때 야곱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서 900km 떨어져 있는 머나먼 땅인 하란으로 피신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하란에서 20년간의 갖은 고생끝에 드디어 결혼도 하고 자녀들도 생기고 또한 거부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풀리지 않은 형 에서와의 관계로 인하여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두려움 그 자체였다. 결국 ‘얍복강 강가’에 홀로 남은 야곱은 밤새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스라엘” 이라는,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거듭난다. 하나님을 만난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를 듬뿍 체험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지나간 옛 이름 “야곱”이 아닌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에 걸맞게 살아가야 하는데 과연 “야곱”이 “이스라엘”로 살아갈까?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하다.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약속의 땅인 벧엘로 올라가지 아니하고 단지 눈에 보기에 좋은 풍요로운 땅인 세겜에서 자그마치 10년이나 머물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눈에 보이는 대로, 이생의 자랑 가운데 살아가는 “야곱”의 모습 속에는 전혀 “이스라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음에도 아직도 자신 밖에 모르는 철저한 이기적인 옛 모습인 “야곱”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요 앞서 언급한 “이미… 그러나 아직…”의 실체인 것이다. 분명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그러나 아직”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야곱”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인내하시면서 결국은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절대적 사랑! 바로 여기에 위로와 소망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있기에 오늘도 나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몸부림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이러한 은혜를 알기에 다른 사람을 대할때에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보다 조금 더 인내하고 기다려주고 격려해서 함께 신앙의 여정을 끝까지 걸어가는 소망이 있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