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만남, 그 관계에 대하여

2025-04-10 (목) 12:00:00 허경옥 수필가
크게 작게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가슴이 설레는 일이다. 함께 쌓아 놓은 정겨운 추억이 많은 친구들은 만나러 가는 발걸음을 더 경쾌하게 한다. 그 만남에는 나를 포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이 있다. 자라지 못한 어린 내가 불쑥 나오더라도 있는 그대로 받아 준다는 믿음이 있다. 물론 그렇게 흐트러진 나를 타박하며 놀리기도 하지만 그 내면에는 따뜻한 사랑이 있다. 이런 친구들 앞에서는 자랑거리도 쉽게 알리고, 어렵고 수치스러운 일도 마음 놓고 나눌 수 있다. 내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고 내 수치를 품에 안아주는 넉넉함이 있다. 이런 친구들이 있어 죽을 것 같은 고난에서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도 비슷한 설렘이 있다. 어떤 사람들일까? 어떤 삶을 어떤 가치관으로 살아왔을까? 그에 대한 궁금함에 눈동자가 자꾸 커진다. 그러나 정작 만난 자리에서는 나를 알리고 싶은 마음이 그 궁금함보다 앞서곤 한다. 그가 나와 비슷한 가치관을 따르고 있음을 알게 되면 그 마음은 더 성급해진다. 나도 이렇게 살아왔다고 서둘러 말했을 때 그의 눈동자에서 반기는 빛이 반짝하면 하던 말은 더 빨라지고 더 많은 사건이 머릿속에서 줄을 선다. 그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너무 많은 시간 동안 내 이야기만 했을 때, 씁쓸한 후회로 헤어지는 발걸음이 무거울 때도 있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잘 조정하여 서로 서로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을 때는 그 만남은 유쾌한 기억으로 남고 그다음의 만남을 기대하게 된다.

물론 힘든 만남도 있다.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이 있는 모임은 불편하다. 어쩔 수 없이 참석했다가도 일찍 일어나야만 하는 핑계를 대고 서둘러 거리로 나간다. 누구에게도 말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자기 말만 계속하는 사람은 모두를 지겹게 한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은 그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걸게 한다.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흉을 보는 사람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나를 그렇게 흉볼 것 같아 옷깃을 더 여미고 자세를 바로 하게 한다. 자기 자랑을 끝없이 하는 사람을 보고 있자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의 가슴에 있을 법한 커다란 구멍이 그려지고 그곳을 드나드는 찬바람에 때론 내 가슴도 시려온다.

우리는 모두 사랑과 관심을 먹고 성장한다. 사랑을 받지 못해 아직도 헛헛한 사람은 관계에서 자주 어려움을 겪는다. 그 상처 난 부위는 필요 이상으로 단단해지기도 하고, 아물지 않아 조금만 건드려도 진물이 나기도 한다. 이런 것은 남의 눈에는 쉽게 보이지만 스스로는 보기 힘들다. 자기 합리화에 익숙한 우리는 남이 사실을 말해 주어도 인정하기 힘들어하고 때론 강하게 부정한다. 우리 모두에게는 상처받은 자아가 있다. 평소에는 못 느끼지만 어느 특정한 사람과의 관계가 힘들 때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그의 문제는 쉽게 보이고 내 문제는 보이지 않아 힘든 관계의 탓을 그에게 돌리지만, 사실은 내 안에도 자라지 않은 미성숙한 내가 있음을 안다. 그것을 인정하고 그런 나를 받아들일 때 그 만남이 조금씩 쉬워진다.

<허경옥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