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린다. 오래도록 기다리던 연인을 만난 듯 설렌다. 지붕이 펄펄 끓고 아스팔트가 녹아내릴 때도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다. 꽃이 시들고 잔디도 군데군데 말라갔다. 가뭄이 해갈될 비를 간절하게 기다렸다.
간절함으로 어떤 사람을 종일 기다려 본 적이 있다. 대학 졸업을 앞둔 겨울 어느 날이었다. 이미 취업한 친구가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보증을 부탁하면서 몇 장의 서류를 내밀었다. 이제 갓 사회 초년생이 된 내가 누구의 보증을 설 수 있단 말인가. 직업도 정해지지 않았고 수입도 없어 불가능했다.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신문사에 계시는 그녀의 아버지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혹했다. 그분이 나를 합격시켜 줄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무엇이든 해 보고 싶었다. 내 꿈을 잘 아는 엄마가 어렵게 보증을 서 주었다.
이른 아침 학교 앞 제과점에서 그녀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의 아버지에게 인사하러 가는 날이었다. 마음이 급하여 약속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몇 시간이 지나도 친구는 오지 않았다. 종업원들이 수군거리며 흘금거리는 눈길이 느껴졌다. 오랜 시간 미동도 없이 한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 이상한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친구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 않았다. 내게 오는 중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며 애써 불안한 마음을 떨쳐냈다. 혹시 수화기가 잘못 놓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전화국에 문의 하였다. 전화선을 뽑아 놓아서 그렇다고 했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서너 시간을 더 기다렸다. 한 마디 대사라도 얻고 싶은 무명 배우와도 같은 절박한 심정이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 집으로 돌아왔다. 그까짓 것에 기대었던 내 마음이 부끄러웠고 내동댕이쳐진 우정과 믿었던 친구의 배신 때문에 눈물이 났다.
원하던 직장은 좌절되고 다시 도전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젊은 날의 열정도 사그라지고 감내하고 포기해야 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려 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간절한 마음을 담은 기우제는 실패가 없다. 왜냐하면 비가 올 때까지 계속되기 때문이다. 제물을 올리고 주름진 손을 모아 온 정성을 다해 기도한다. 마른 입술로는 비를 내려달라는 주문을 외운다. 가뭄으로 땅이 쩍쩍 갈라질 때, 지옥 불처럼 불길이 번질 때 그 어느 곳에 계시는 신에게 이르기를 기원하는 마음이 얼마나 애가 탈지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그들의 기도가 닿아 마침내 비가 내리는 날 기우제는 끝이 난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는데 뒷심이 부족한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가다가 주춤거리기도 하고 멈추기도 했다. 옆을 살피면서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장애물에 부딪혀 주저앉기 일쑤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시절 그 길을 가지 못한 것은 간절함이 부족했던 탓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심정이 아니었다. 그가 나의 합격을 보장해 주는 사람도 아닌데 어쩌자고 그토록 믿었을까. 절실한 순간에 간절함이 더 커지는 것이라 상실감도 그만큼 컸다. 아마도 그때 계속할 힘도 의지도 없는 내가 슬퍼서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가끔은 간절함으로 열병을 앓던 젊은 날 그 순간이 그립다. 숨이 턱에 차는 절박함으로, 가슴 뛰는 성취감으로, 생이 채워진다면 얼마나 멋진 일일까.
그 누구의 간절함이 닿은 눈물인지 모르는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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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실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