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대통령이 케네디센터의 이사장으로 ‘셀프’ 취임했다는 소식에 충격과 분노와 실소가 한꺼번에 몰려온다. 트럼프는 지난 7일 케네디센터의 데이빗 루벤스타인 이사장을 해고하고 자신이 이사장직에 올랐으며, 10일에는 데보라 러터 회장 및 바이든 대통령이 임명한 18명의 이사들을 해임했다. 그 자리는 자신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충신들로 채웠는데 대다수가 문화예술분야에 문외한인 비전문가들이다.
케네디센터(Kennedy Center for the Performing Arts Theatre)는 어떤 곳인가? 가장 친문화적이었던 존 F. 케네디를 기념하여 1971년 세워진 이 공연장은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는 국립기관으로서 현직 대통령이 회장과 이사들을 임명한다. 하지만 지난 50여년간 정치색이나 당파와는 무관하게 독립성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트럼프의 전례 없는 인사 조치에 많은 문화계인사들이 당혹과 우려를 표하고 있다.
트럼프는 왜 갑자기 문화예술분야에까지 마수를 뻗기 시작했을까? 취임 후 한달 동안 미국과 국제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을 만큼 수많은 정책들을 취소하고 동결하고 삭감하고 해고하고 추방하느라 엄청 바빴을 텐데 말이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하나는 그가 첫 임기를 시작했던 2017년, 케네디센터 명예상(Kennedy Center Honors)의 수상자 한사람이 트럼프의 반이민, 반문화, 인종차별적 정책에 반대하며 시상식 갈라를 보이콧한데서 비롯됐다. 이 명예상은 매년 미국의 문화예술계에서 큰 공을 세운 5명에게 수여되는 영예로운 상이며, 그해 12월 백악관에서 열리는 모금 갈라는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만찬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수상자 노먼 리어(작가 겸 프로듀서)가 불참을 선언하자 트럼프는 노발대발했고, 그때부터 임기 내내 갈라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는 케네디센터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어서 한동안 워싱턴 정가에서 가십거리가 됐었다.
또 하나는 지난해 케네디센터에서 열린 여장남자 공연(Dancing Queens Drag Brunch)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금지하고, 여권의 성별표기에서 M(남)과 F(여) 외에 X(제3의 성)를 삭제한 트럼프에게 성소수자 문화는 용납될 수 없는 척결대상이다. 트럼프가 자신의 소셜미디어인 트루스소셜에 “나는 예술과 문화의 황금시대를 위한 우리의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 이사장과 케네디센터 이사들을 즉각 해임했다”면서 “케네디센터에서 더 이상 드래그 쇼는 없다”고 쓴 것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또한 민주당 성향의 ‘워크’(woke 사회적 정치적 깨어있음) 문화와의 전쟁을 선포한 것이며, DEI(다양 평등 포용) 금지정책과 맥을 같이 하는 획일적 보수주의의 선언이다.
그런 한편 트럼프는 취임 첫날 수십개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는데 그중 하나가 대통령 예술인권위원회(President’s Committee on the Arts and the Humanities)의 해체였다.
대통령 예술인권위원회는 1982년 레이건 대통령 시절 창설된 연방기관으로 예술과 문화, 인권 분야에 대해 대통령에게 조언하고 예술교육지원 프로젝트를 맡아온 중요한 단체다. 그런데 2017년 샬로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폭력사태가 일어났을 때 트럼프가 극우파를 두둔하자 예술인권위원회 위원 17명이 일제히 비난하며 사임했고, 트럼프는 “그러잖아도 미국인들의 세금만 낭비하는 이 단체를 없앨 작정이었다”고 맞서면서 위원회가 해산되고 말았다.
하지만 5년 후인 2022년, 바이든 대통령은 이 위원회를 복원시키는 행정명령을 내렸고, 레이디 가가와 브루스 코헨을 공동회장으로, 조지 클루니를 비롯한 31명의 회원을 임명했다. 그런데 2년 반 만에 트럼프가 다시 또 이 위원회를 없애버렸으니, 이 단체만큼 정파에 휘둘리며 파란과 곡절을 겪은 기관은 없을 것이다.
미국사회가 아무리 양분됐어도 문화예술분야는 초당파 무풍지대였다. 하지만 자유정신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은 소수와 약자, 사회의 보이지 않는 구석을 드러내는 작업을 서슴지 않기 때문에 보수파 기득권층에게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독재 정권이 들어서면 문화예술부터 탄압하고 통제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화가였던 히틀러는 자기가 싫어하는 큐비즘, 다다이즘, 표현주의 작품을 ‘타락한 예술’이라고 탄압하며 ‘퇴폐미술전’을 열어 조롱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 후에 파괴했다.
스탈린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공식 미술양식으로 선포하고 모든 작가는 소비에트 예술가동맹에 가입하도록 했으며 모든 작품은 공산당이념을 표명하는 영웅적인 인물, 즉 밝은 표정으로 힘차게 일하는 노동자, 농민, 병사의 모습들을 그리도록 강요했다.
중국에서는 1966년부터 10년 동안 마오쩌둥이 벌인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문화유산이 파괴됐고, 최소 수십만에서 최대 2,000만명이 사망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도 박근혜 정부 시절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존재했던 것을 모두가 아는 바다.
21세기 미국도 거꾸로 가기 시작했나. 민주주의의 아성이며 자유와 기회의 나라가 한 사람 때문에 혼란에 빠져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술은 죽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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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